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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63~70부

글쓴이 : 김태영 날짜 : 2026-07-24 (금) 18:48:50


첫째, 최초의 <한서>는 유흠(劉歆: BC46∼AD23)이 지은 것인데 반고는 유흠의 <한서>를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갈]홍의 집에 대대로 유자준(劉子駿: 유흠의 字)의 <한서> 100권이 전해오고 있는데 ...시험삼아 반고의 <한서>와 비교해보니 거의 전부가 유흠의 책에서 취한 것으로 약간의 차이만 있다. 유흠은 왕망의 찬위(簒位)를 도운 사람이며 왕망 밑에서 국사를 지낸 인물로 유흠이 왕망에 대한 기사를 거짓으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개연성(蓋然性)과

둘째, 김당과 왕망은 형제이지만 김당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한 기록이 반고의 <한서>에 없으며

셋째, 지나의 사서들이 기록한 바와 같이 왕망은 한(漢)나라를 뒤엎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한 자인데 역적의 아버지에 대해 구체적인 가계 설명이 없이 ‘왕망의 아버지는 만(曼)인데 일찍 죽었다’고 한 점

넷째, “당(김당)의 어머니 남(남대부인)은 곧 망(왕망)의 어머니인 공현군으로 같은 어머니가 낳은 동생이다”라는 내용이 <한서> 외에 정초(鄭樵)가 지은 <通志(통지)>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정초(1131〜1162)는 남송 때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 매우 박식한 인물이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 과거를 본적도 없는 산림지인(山林之人)으로 오직 고금의 서적을 읽기 원하고 백가의 학문을 꿰뚫어 알며 육예의 글을 토론하는 것으로 보좌하여 평생 후회가 없는 삶을 산 사람이다. 따라서 정치적인 이해관계도 없이 오직 평생 학문에 전념한 역사학자인 정초의 기록을 믿지 않을 수 없고

다섯째, “알지(閼智)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미추의 아버지다. 점해가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임금으로 세웠으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게 된 시초다.라고 하여

김알지로부터 7세에 이르러 미추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김일제는 7세에 걸쳐 투후라는 벼슬을 했다는 대목으로 볼 때 김일제와 김알지, 김상과 세한, 그리고 7세라는 내용 등의 각색(脚色)

여섯째, 김알지가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씨성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 들이기에는 무리라는 점

일곱째, 왕망이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기 때문에 신도후의 신자를 따서 신(新)나라를 세웠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992년 사직(社稷)의 신라가 왜 서나벌, 사라, 사로, 계림 등의 국호를 버리고 김씨로서 신라 최초로 왕이 된 제13대 미추이사금(262)이 신(新)자를 따 신라(新羅)라고 국호를 정한 이유 등을 들 수 있다.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64부

제2절. 김당과 왕망이 이종사촌이라는 견해

혹자는“當母南卽莽母功顯君同産弟也”를 “김당의 어머니 남은 곧 왕망의 어머니 공현군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다”라고 해석하여 김당과 왕망을 이종사촌(姨從四寸) 형제로 보고 있으나 논자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왕망과 김당은 친형제로 보았다.

이렇게 주장한 결정적인 이유로

첫째, 김당의 아버지이며 김건의 아들이고 김일제의 손자(⍰) 이름을 문헌사료에서 찾을 수 없고

둘째, 제(弟)는 남자 사이에 사용하는 반면 여자 사이에는 자(姊)나 매(妹)란 단어를 사용해야 하며

셋째, 재야사학자였던 문정창(文定昌: 1899∼1980)도 같은 주장을 했었으며 필자는 문정창의 견해를 따르고

셋째, 왕망과 김당이 이종사촌 관계라면 한(漢)나라의 난리 때문에 김일제의 자손인 김씨들이 황하(黃河)를 건너 산서성의 요동(遼東)으로 피신할 필요가 없다. 대역죄인이라 하여 삼족(三族) 즉, 친족(親族),처족(妻族), 외족(外族)을 멸한다 하지만 이종사촌의 경우는 삼족의 범위에 들지도 않는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지금까지 함께 살핀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한(漢)나라를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로 왕씨가 아닌 김씨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왕씨(王氏)의 유래를 살펴보자. “왕씨는 자(子)성으로 상(商)나라 말에 왕자 비간(比干)이 주왕(紂王)에게 간하여 착한 일을 하도록 한 이유로 살해당했다. 장지는 급군(汲郡)이다. 그의 자손이 그 땅에 살면서 무덤을 지켰다. 그로 인하여 왕족에서 근본이 되었다. 성(姓)을 고쳐 왕씨라 했다”라고 적고 있다.

비간의 묘지가 있는 급군의 위치를 알아보자. “급군은 진(晉)나라가 두었다. 급현을 다스렸다. 오늘날의 하남성 급현 서남 25리에 있다. 후에 폐지했다. 후위(後魏)가 다시 두었다. 곧 고쳐 오성군(伍城郡)이라 했다.”

급현을 찾아보겠다. “급현은 전국시 위읍(魏邑)이다. <사기> 진(秦) 장양왕 3년에 몽오(蒙驁)가 위급(魏汲)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또 진시황 7년에 몽오가 다시 군사로 급을 공격했다. 한나라가 현을 설치했다. 북제는 생략했다. 옛 성(城)은 지금의 하남성 급현 서남 20리에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는 약간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65부

급군에 대한 기록을 검토해 보자.

“급군은 서진(西晉) [진]시황 2년에 두었으며 관할한 곳은 급현에 있다. (지금의 하남성 위휘시(衛輝市) 서남이다). 후에 폐지했다. 북위(北魏) 태화(477∼499) 12년에 다시 설치하고 후에 옮겨 방두성(枋頭城)을 관할했다. (오늘날의 기현 동남이다).

수나라 개황(581∼600) 초에 폐지하고 대업(605∼618) 초에 다시 고쳐 위주(衛州)를 급군(汲郡)이라 했으며 옮겨 위현을 관할했다. (지금의 기현 동쪽이다).

당나라 무덕(618∼626) 초에 그대로 고쳐 위주(衛州)라 했다. 정관(627〜649) 원년에 옮겨 급현을 다스렸다. (지금의 위휘시이다). 천보(742∼756) 초에 고쳐 급군(汲郡)이라 했다. 건원(758〜759) 초에 다시 위주(衛州)라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보면 위(衛)와 위(魏)가 혼동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지명이 모두 황하 북부 하남성 하내에 있음은 분명한데 정확하게 두 곳의 위치가 불명확하다.

더 조사해 보자. <春秋釋例(춘추석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묘(苗): 하내 지현(軹縣) 동남에 묘정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元豐九域志(원풍구역지)>에 “지(軹) 땅이 위읍(魏邑)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66부


지현을 찾아보았다. “지현(軹縣)은 전국시 위지읍(魏軹邑)이다. ...옛 성(城)은 오늘날의 하남성 제원현 동남 13리에 있다. 지금의 이름은 지성진(軹城鎭)이다.” 마침내 위(魏)의 위치를 찾았다.

제원(濟源)은 패수가 흐르는 곳이다. 단군조선 시기에는 예수(濊水)라고 부른 하천이다. 바로 이 제원 동남 13리에 위(魏: 軹)가 있었으며 이곳이 바로 왕씨(王氏)가 연유된 비간(比干)의 무덤이 있던 급군(汲郡)이다.

현대 지도에는 지명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왕옥산 남부와 제원 서쪽과 황하 북쪽이 바로 왕검(王儉) 단군의 고향 단향(壇鄕)이 있던 곳이다. 본고 <그림 2>에서 단향의 위치를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묘(苗)는 삼묘족(三苗族)을 일컫는 말로 감숙성 삼위산(三危山)에서 기원한 한인(桓因)의 후예이다.

하내에 위치한 지금의 복양(濮陽)이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의 개경(開京)이다.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의 시조는 단군조선을 세운 왕검(王儉)이고 왕검의 왕씨는 김씨에서 나온 성씨이다.

왕(王)씨의 유래를 보면 자성(子姓)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자성은 상(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에서 상나라의 자손을 자씨라고 부른 것에 불과하다.

본고 제II장 제1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나라를 세운 탕(湯)임금이 소호금천씨의 후예임으로 주나라가 부른 자씨 즉, 왕씨 역시 김씨임을 부인할 수 없다. 본고에서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67부

제VI장. 문헌사료에 보이는 지리지명 위치

문헌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긴 시간을 함축하여 짧게 기술한 곳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짧은 기간을 확대하여 길게 기록한 곳도 많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경우가 그 한 예이다. 마한지역인 감숙성 난주(蘭州)에서 시작되어 진한이 위치한 산서성 평양을 거쳐 제3대 유리이사금 초기의 어느 시점에서 강소성(江蘇省)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신라 시조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마치 강소성에서 신라가 개국한 것처럼 묘사되어 정확한 시간 구분과 지역 설정이 애매모호하다.

기사(記事)마다 약간의 년도 차이가 있기는 하나 본고(本考)에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을 따른다.

신라 56명 왕의 행적과 함께 왕을 장사지낸 무덤의 위치를 추적하면서 한국역사학계의 통설처럼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는지 문헌사료에 의거 논거(論據)를 제시하면서 신라 강역을 고증(考證)해 보도록 하자.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68부

제1절. 시조 혁거세거서간

신라 최초의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여 13세의 나이로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곳은 감숙성 난주이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이 후에 진한의 6부가 된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진한과 변한이 위치한 산서성으로 도읍을 옮기지 않은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감숙성에서 산서성 진한지역으로 천도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50∼44년 사이로 보인다. 당시의 천도에 관하여 문헌사료에 기록된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주장은 하지 않겠으나 다음의 기록에서 약간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19년(BC39) 봄 정월 변한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라고 하여 진한과 변한은 서로 이웃한 지역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歷代建元考(역대건원고)>에서도 보인다. “신라 시조는 혁거세 왕으로 박씨이다. 한(漢)나라 선제 오봉(57〜54BC) 원년 갑자에 진한(辰韓) 땅에 도읍을 세우고 재위 61년에 죽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라가 진한 땅에서 도읍했다는 결정적인 내용이 바로 “21년(BC37) 서울에 도성을 쌓아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했다”라는 대목이다. BC57년에 신라가 건국되었으나 도성인 금성(金城)은 건국으로부터 21년 후인 BC37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 최초의 금성은 진한인 산서성 임분시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금성(金城), 금성군(金城郡), 금성현(金城懸)은 그 의미가 각각 다르다. 문헌사료에 나타난 금성군은 모두 3곳으로 “① 감숙성 옛 난주 …② 섬서성 남정현 ...③ 섬서성 한음현 서쪽이라 기술하고 있다.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69부

금성현에 대한 기록을 보자.

“한(漢)나라가 두었다. 옛 성은 지금의 감숙성 고난현(皐蘭縣) 서남이다. 응소가 말하기를 처음에 성(城)을 쌓았는데 금(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옛 금성이다. 설찬이 말하기를 금으로 금의 견고함을 취한 것이다. …금성군조를 보라.

당나라가 연수현을 나누어 [금성]을 두었다. 곧 생략했다. 그 땅은 지금의 강소성 연수현 북쪽 30리에 있다. 금나라가 진(鎭)이라 했다. ...감숙성 금현이다. 민국이 고쳐 금성현이라 했다. 또 변경하여 유중현(楡中縣)이라 했다. ...당나라가 두었다. 명나라는 생략했다. 즉 지금의 산서성 응현(應縣)에서 관할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 인용문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금성현 흑은 금성이란 지명이 감숙성에서 산서성으로 그리고 산서성에서 강소성으로 옮아간 것을 알 수 있다.

“응소가 말하기를 ...옛 금성이다”란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필자는 감숙성에서는 금성(金城)을 축성했다고 믿지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금성군조에서는 금성을 쌓았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단군조선 시기 진한이었던 산서성 임분시에 “신라 금성의 유적”을 진취적인 성헌식(成憲植) 재야사학자가 그의 저서에서 밝혀준 바 있다. “정문 위에 금성(金城)이라는 글자가 뚜렷하다”고 하면서 사진과 함께 제시해주고 있다. 필자는 성헌식의 주장을 따른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거서간이 13세에 왕위에 올라 61년 동안 임금 노릇을 하다가 AD4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74세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모든 임금들의 사망을 홍(薨)으로 적고 있다. 동양의 고대사를 살펴보면 천자(天子)가 죽으면 붕(崩)이라 하고 제후(諸侯)가 죽으면 홍(薨)이라 하며 대부(大夫)가 죽으면 졸(卒)이라 했고 선비인 사(士)가 죽으면 불록(不祿)이라 하고 평민인 서인(庶人)이 죽으면 사(死)라고 기록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 김씨의 시조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신(神)이며 다른 행성에서 이 지구에 이민 온 천자(天子)였다. 또한 한인(桓因)의 5대손인 연등금선자(燃燈金蟬子)가 김씨이니 동이배달한민족은 천자임을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신라는 한(漢), 수(隋), 당(唐) 어떤 나라의 제후국이 된 적도 제후국이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모든 천자의 죽음을 제후가 사망했을 때 칭하는 홍(薨) 혹은 승하(昇遐: 거서간의 사망에만 승하라 함)로 기록한 김부식의 의도를 알 길이 없다.

김부식의 오류이거나 후대의 첨삭(添削)이 아닌가 한다. 이점에 대하여 본고에서는 김부식의 사대주의적인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논자는 신라의 모든 임금들의 죽음을 천자에게 붙이는 붕(崩)으로 적는다. “61년(AD4) 봄 3월에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니 사릉(蛇陵)에 장사했다, 사릉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라 적고 있다.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70부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는, “이르기를 운암사 남쪽 4리에 있다”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재왈운암사남사리(在曰雲岩寺南四里)”에서 ‘가로 왈(曰)’자를 ‘구름 운(雲)’자 위에 붙여서 ‘구름낄 담(曇)’자로 조작했고, ‘남사리(南四里)’를 ‘북(北)’으로 날조(捏造)해 놓았다. ‘담암사(曇岩寺)’는 어디에도 없고 ‘운암사(雲岩寺)’가 있다.

“운암사는 강소성 오현(吳縣) 호구산(虎丘山)에 있다. <속도경(續圖經)>에 이르길 운암사다. 진(晉)나라 왕 순여의 동생 민(珉)의 집이다. 함화(동진: 326∼334) 2년에 기존 학교를 폐했다. 즉 검지를 나누어 동서 두 절이라 했다. 절은 모두 산 아래 있다. 후에 절을 산위로 옮겼다. <고미호구산지>의 운암사이다. 즉 호구산 절이다. 송나라가 고쳐 운암이라 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호구산의 기록을 보자. “호구산은 강소성 오현 서북 7리에 있다. 일명 해용산(海湧山)이다. <오월춘추>의 합려봉이다. 마을 입구 밖에 호구산이 있다. 장사지내고 삼일이면 백호(白虎)가 그 산 위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옛날에 호구라 했다. ...소주에서 경치가 좋은 곳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박혁거세의 장지는 담암사[운암사] 북쪽에 있는 사릉(蛇陵)이며 운암사는 오늘날의 강소성에 위치한 호구산에 있는 절(寺)을 뜻한다로 요약된다. 혁거세간 무덤의 위치는 제3대 유리이사금 묘를 설명할 때 함께 그림으로 표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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