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절. 남해차차웅
남해차차웅 원년(4) 가을 7월에 낙랑군사가 와서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으며 “20년((23) 가을에 금성(金星)이 태미성(太微星) 자리에 들어갔다”라고 적고 있다.
태백성이란 밤하늘에 가장 찬란하게 비추는 별로 금성(金星)을 뜻하고 태미성이란 은하수의 중심에 있는 삼원(三垣) 즉, 태미원, 자미원, 천시원 중의 하나로 단군조선의 삼한(三韓)인 진한(태미원), 마한(천시원), 변한(자미원)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여기서의 태미원이란 진한인 고구려를 암시한다. 다시 말하면 금성은 신라를 의미하며 태미성은 고구려를 뜻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AD23년에 “금성이 태미성 자리에 들어갔다”는 말은 금성이 있던 땅을 고구려에게 빼앗겼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본고 제III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라와 고구려는 진한의 도성이 있던 산서성 임분시였다. 23년은 전한(前漢)을 무너뜨린 왕망이 신(新)나라를 세워 15년간 지속되다가 적미군이란 농민반란군에 의해 신나라가 망한 해이기도 하다.
본고 제IV장 제1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나라가 덕(德)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김일제의 후손)은 멀리 떨어진 요동(산서성 임분)에 숨어 살게 되었다”라는 기록과 관련시켜 보아야 한다.
신라는 고구려와 함께 진한인 임분에 있던 땅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산서성 남동부 원곡(垣曲)에 있던 변한땅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신라를 진한(辰韓)이라 하기도 하고 변한(弁韓)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심지어는 변진한이라 일컫기도 한다.
신라를 진한이라 기록한 문헌사료는 『樂書(락서)』, 『北史(북사)』, 『通鑑地理通釋(통감지리통석)』, 『太平寰宇記(태평환우기)』,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 『太平御覽(태평어람)』, 『冊府元龜(책부원구)』 등 7종이다.
반면에 신라가 변한이라 기록한 곳은 『四書通證(사서통증)』,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 『諸蕃志(제번지)』, 『五代會要(오대회요)』, 『玉海(옥해)』, 『小學紺珠(소학감주)』 등 모두 7종이다.
또한 변한을 변진(弁辰)으로 기술하고 있는 문헌사료는 모두 28종에 달한다. 아무튼 신라를 진한 또는 변한이라 한 것은 신라가 진한 땅에서 개국하였으나 고구려의 힘에 밀려 변한 땅으로 옮긴 사실에 대한 오류로 보인다.
“21년(24) 가을 9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라고 하여 제1대 혁거세 거서간과 같은 곳에 장사지냈다고 적고 있다. 제3대 유리이사금의 장지를 설명하면서 사릉에 대한 지도를 제시하겠다.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72부
제3절. 유리이사금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9년(32) 봄에 6부의 이름을 개정하고 이어 성(姓)을 내리니 …이(李)라 하였으며 …최(崔)라 하였으며 …손(孫)이라 하였으며 …정(鄭)이라 하였으며 …배(裵)라 하였으며 …설(薛)이라 했다. 13년(36)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 함락시켰다. 14년(37)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쳐서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와서 의지하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신라가 도성을 산서성에서 제2대 남해차차웅 말기에서 제3대 유리이사금 초기 사이에 동남쪽에 위치한 강소성(江蘇省)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낙랑은 산서성 남부 변한의 도성(都城)이 있던 원곡(垣曲) 일대로 변한과 거의 같은 지역이고 강소성에 위치한 신라의 북쪽이며
둘째, 고구려 무휼이 낙랑을 멸하자 낙랑 사람 5천명이 남쪽에 있는 신라로 내려온 것이며
셋째, 혁거세거서간이 단군조선 유민들이 살던 6촌을 산서성 임분에 있던 진한에 흡수하여 6부라 하였으나 변한(원곡)에서 남쪽 강소성으로 천도한 곳에 새롭게 유리이사금이 6부의 이름을 개정하고 6가지 성씨를 하사한 것은 논리적이라는 점과
넷째, 이 시기에 신라의 도읍지 금성이 산서성 임분시에 있었다면 낙랑이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 왜냐하면 신라 임분시(요동군)의 금성은 낙랑의 북쪽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는데 조선현(朝鮮縣), 남감현, 패수현(浿水縣), 함자현(含資縣), 점제현(黏蟬縣), 수성현(遂成縣), 증지현(增地縣), 대방현(帶方縣), 사망현(駟望縣), 해명현(海冥縣), 열구현(列口縣), 장잠현(長岑縣), 둔유현(屯有縣),
소명현(昭明縣), 누방현(鏤方縣), 제해현(提奚縣), 혼미현(渾彌縣), 탄열현(呑列縣), 동이현(東𦖮縣), 불이현(不而縣), 잠태현(蠶台縣), 화려현(華麗縣), 사두매현(邪頭昧縣), 전막현(前莫縣), 부조현(夫租縣) 등이다.
이들 대부분은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에 위치한 지명들로 시기에 따라 낙랑의 범위가 다소 확장되거나 축소되었다. 낙랑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14>와 같으며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학술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73부

“10월에 왕(유리이사금)이 세상을 떠나니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릉은 담암사(운암사) 북쪽에 있다는 내용은 시조 혁거세 거서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강소성 호구산(虎丘山)에 위치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통설인 담암사(운암사)의 위치는 “한반도 경주 남천의 남쪽에 있던 절”이라 하여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전혀 근거없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
한반도 경주 남천의 남쪽에 담암사(운암사)가 있다면 이 절이 있는 곳은 반드시 호구산이여야 하고 이곳에 사릉원이 있어야 하며 혁거세거서간,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등의 묘지(墓地)가 경주 남천의 남쪽에 필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 왕들의 묘지는 경주에 없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역사를 왜곡했을까? 논자는 김부식은 신라 왕들의 묘지에 관하여 조작, 날조, 왜곡했다고 믿지 않는다. 왜곡할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이곳 사릉에는 제1대 혁거세거서간, 제2대 남해차차옹, 제3대 유리이사금, 제5대 파사이사금 4왕의 묘가 있다.
혁거세거서간은 AD4년에 사망했고 남해차차웅은 AD24년에 사망한 왕들이다. 남해차차웅이 사망하고 남해차차웅 말기 아니면 3대 유리이사금 초에 산서성 변한인 원곡(垣曲)에서 강소성으로 도읍지를 옮기면서 혁거세거서간과 남해차차웅의 묘지도 함께 강소성으로 옮긴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혁거세거서간과 남해차차웅은 산서성(山西省)에서 사망한 왕들이기 때문이다. 다음 <그림 15>에서 혁거세거서간,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그리고 파사이사금 네 명의 왕들의 묘지가 있는 강소성 호구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74부
제4절. 탈해이사금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9년(65)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에 있는 시림(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금빛 작은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어 호공이 돌아와 아뢰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상자를 가져오게 하여 열어보니 어린 사내아이가 그 속에 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여 측근의 신하에게 말했다.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 아니랴.’ 이에 거두어 길렀는데 성장하여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상자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했으며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본 인용글에서 중요한 단어는 금성(金城), 계림(鷄林), 그리고 알지(閼智)이다. 본고 제VI장 제1절에서 금성군과 금성현에 관해 살펴본 바 있다.
여기서는 신라의 도읍지인 금성(金城)의 위치를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는 “금성은 강소성 구용현(句容縣) 북쪽에 있다. 동진(東晉) 건원(343∼344) 2년에 저부(褚裒)를 연주자사로 삼았으며 진(鎭)을 출발하여 이곳으로 갔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금성은 강소성 구용현 북쪽에 있다. 동진(東晉) 함강(335〜342) 7년에 환온(桓溫)이 진강을 출발하여 금성에 도달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용현의 위치를 찾아보자. “구용현은 한(漢)나라가 설치했다. 무제가 장사정왕자 유당(劉黨)을 후읍(侯邑)으로 삼았다. 장회태자가 말하기를 구용현 근처에 구곡산(句曲山)이 있다. ...청나라 때 강소성 강령부(江寧府)에 속했다. 지금은 강소성 금릉도(金陵道)에 속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금성은 오늘날의 강소성(江蘇省) 구용현 북쪽에 있으며 구용현은 강소성 강령(江寧)으로 요약된다.
한국역사학계는 신라의 도읍지 금성이 한반도 경상북도 경주라고 통설로 믿고 있으나 문헌사료로부터 논거(論據)를 제시하지 못한 허구의 잡설에 불과하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75부

계림은 신라의 국호가 된 적이 있는 지명으로 신라를 지칭하는 대명사와 같다. 계림을 기록하고 있는 원전문헌(原典文獻)은 1차사료인 <구당서>와 <신당서>를 포함하여 약 334종, 618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경상도에 계림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모두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들 334종 어느 한 곳에도 한반도 경상도에 계림이 있었다고 기술한 문헌자료는 없을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계림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단서(端緖)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계림이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번지”라 믿고 있는 한국사학계의 통설이 꾸며낸 이야기(fictitious story)이기 때문이다.
계림(鷄林)에 대해서 알아보자.
“계림은 옛 나라 이름이다. 즉 신라이다. 신라 탈해왕 9년 (한나라 명제 영평 8년)의 시림(始林)이다. <신라지명>에는 계괴(鷄怪)가 있다. 계림이라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로 인하여 계림이 국호가 되었다.
<구당서신라전>에 ‘용삭(661~663) 3년에 조서로써 그 나라를 계림주 도독부라 하였다.’ 근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길림(吉林)을 계림이라 부른다. 곧 음(音)이 비슷하여 전해 내려온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는 계림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대신 계산(鷄山)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계산은 강소성 오현(吳縣) 서남쪽에 있다.”
함께 실펴본 내용을 요약하면 신라의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하였으며 계산(鷄山)의 위치는 오늘날의 강소성 오현 서남쪽이라는 것이다. 계림의 림(林)은 ‘수풀’이나 ‘숲’을 뜻한 것으로 들이나 바다가 아닌 산(山)에 수풀과 숲이 있어야 함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思考)이다.
따라서 계림이 계산임을 알 수 있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에 대해서는 본고 제IV장과 제V장에서 자세히 살펴본 내용으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신라의 계림과 금성의 위치를 다음 <그림 1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대한 사료비판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금성과 계림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라 제4대 탈해이사금 9년으로 65년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하여 이 두 지명대사전은 시기를 왜곡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진(東晉) 건원 2년은 344년이며 동진 함강 7년은 341으로 65년에 신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마치 280년 후에 동진 시기에 발생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24년(80) 가을 8월에 왕(탈해이사금)이 세상을 떠나니 성(城)의 북쪽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이 시점에서는 양정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자세한 내용은 www.historyofcorea.com 으로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76부
제5절. 파사이사금

“8년(87) 가을 7월에 영을 내렸다. ‘내 덕(德)이 없으면서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어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덕은 능히 백성들을 편안케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수리하여 침범에 대비할 것이다. 이달에 가소(加召)와 마두(馬頭)의 두 성을 쌓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라의 서쪽은 백제이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하고 있는 지형이라 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의 핵심 영토는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 동부였고 서쪽으로 백제는 호북성(湖北省), 호남성(湖南省), 안휘성 서부 그리고 신라 남쪽의 가야는 절강성(浙江省)을 뜻하는 것으로 이들 삼국은 모두 대륙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15년(94) 봄 2월에 가야의 적군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므로 아찬 길원(吉元)을 보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가 쳐서 쫓게 했다. ...22년(101) 봄 2월에 성(城)을 쌓아서 월성(月城)이라 하고 7월에 왕이 월성에 옮겨 거처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사학계의 통설로 “마두성은 경상남도 거창시에 있었던 삼국시대 신라시기의 성곽”이라 하고, “월성(경주 월성)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궁궐이 있던 곳의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 또는 반월성이라 불렀다”라고 밝히고 있다.
신라의 마두성의 위치를 추적해 보자. 성(城)은 대체로 산이나 산맥의 험준한 지형지물에 의거하여 축성한다. 따라서 마두산의 위치를 알면 이곳에 마두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두산은 안휘성 숙송현(宿松縣) 동남 80리에 있다. …안휘성 려강현(廬江縣) 동북 70리에 있다. …절강성 무강현(武康縣) 서남27리에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 신라의 서쪽에 위치하여 주로 호북성, 호남성 그리고 안휘성 서부 일부를 영토로 관할하였고 신라는 강소성, 안휘성 동부 일부 그리고 절강성 북부 일부를 영토로 가지고 있던 시기로 신라의 영역안에 위치한 마두산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절강성의 마두산은 추적 대상이 되지않고 안휘성에 있다는 숙송현과 려강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숙송현의 기록은 없고 려강현의 위치가 보인다. 려강현은 대략 경도 117도 우측과 위도 31도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 <그림 17>과 같다. 월성의 위치는 앞의 <그림 16>을 참고하기 바란다.
문헌사료에 의해 밝힌 신라 마두성(산)과 월성의 위치는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과는 확연히 다르다. 한반도에는 신라도 가야도 백제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나 가야나 백제에 관한 지리지명들이 없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학술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33년(112) 10월에 왕(파사이사금)이 세상을 떠나니 사릉원 안에 장사지냈다”라고 하여 제5대 파사이사금 왕이 묘지가 강소성 사릉(蛇陵)이라고 밝혀주고 있다. 강소성 호구산에 있는 사릉의 위치를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으니 앞의 <그림 15>에서 파사이사금 묘를 참조하기 바란다.
자세한 내용은 www.historyofcorea.com에서
댓글(이병환): 위의 본문 중에
━ 단군조선 시기 진한이었던 산서성 임분시에 “신라 금성의 유적”을 진취적인 성헌식(成憲植) 재야사학자가 그의 저서에서 밝혀준 바 있다. “정문 위에 금성(金城)이라는 글자가 뚜렷하다”고 하면서 사진과 함께 제시해주고 있다. 필자는 성헌식의 주장을 따른다. ━
"정문 위에 금성((金城)" 정문이 언제 세워진 것입니까?
논평(김태영학파T.K.School): 정문이라 한 것은 벽돌처럼 보이는 재료로 축조된 금성(金城)의 입구를 뜻한 것이며 금성이 언제 건축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금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성헌식, <천년 만에 밝혀진 안시성과 살수> 서울: 도서출판 지샘, 2010, pp.158-159를 직접 참고하기 바란다.
평자(評者)의 생각으로는 금성의 정문에 금성이란 글자가 언제 새겨진 것인지 보다는 수많은 문헌사료들이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 진한(辰韓)의 도읍지였던 산서성 임분 평양(平壤)에 신라의 금성이 지금까지 위용(偉容)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오늘날의 대륙 산서성 임분시(臨汾市)에는 ⓵ 단군왕검의 평양 ⓶ 진한의 도성 ⓷ 신라의 금성 ⓸ 고구려의 평양성 ⓹ 대진의 중경(중경현덕부) ⓺ 고려의 서경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신라가 망한지 약 1,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신라의 옛 금성이 산서성 임분시에 실존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헌사료에 기록된 신라의 금성과 진한•평양인 임분의 신라금성의 실체(實體)가 서로 부합(符合)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문헌 기록의 내용과 해당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이나 유물이 딱 맞아 떨어질 때 고고학(考古學: Archaeology)이 역사학을 보조하는 보조학문으로 그 소임을 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헌사료의 기록이 없는 곳에서 나오는 유물이나 유적은 가짜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다는 한국학계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허구의 소설이고 잡담(雜談)이다.
문헌고증과 유물의 현지실존은 반드시 서로 일치(一致)되어야 한다. 알겠는가?
논문열람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77부
제6절. 지마이사금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4년(115) 봄 2월에 가야가 남쪽 변경을 침범했다. 가을 7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정벌했는데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너니 가야 사람들이 군사를 수풀 속에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왕은 군사를 격려하여 분발하고 공격하여 포위망을 뚫고 퇴각했다. 5년(116)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가야를 침범하게 하고 왕은 강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뒤따르니 가야에서는 성안에서 굳게 지켰다. 마침 오랫동안 비가 내리므로 돌아왔다.”
라고 하여 신라 제6대 지마이사금 4년인 115년에 남쪽에 있던 가야가 신라의 남쪽 변경을 침범했고 7월에는 지마이사금이 직접 가야를 정벌했는데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다고 기술하고 있다.
황산(하)이란 지명을 찾아보자.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황산(黃山)이란 지명이 모두 9곳으로 나온다. ① 산동성 ② 산서성 ③ 하남성 ④ 강소성 무진현 서북 ⑤ 강소성 강음현 ⑥ 안휘성 ⑦ 호남성 ⑧ 절강성 ⑨ 섬서성 등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는 강소성(江蘇省)에 위치했기 때문에 신라의 남쪽은 안휘성 남부와 절강성 북부 일대이므로 이 지역에서 황산이란 지명을 찾아야 하며 황산이란 지명에 하천(河川)이 있으면 이 하천이 바로 황산하가 되는 것이 논리적인 사고다.
다음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안휘성 남부에 황산이란 지명이 나오며 하천이 함께 나타난다. 여기서는 황산하인 하천을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으나 현대 대륙지도에 뚜렷하게 나타남으로 직접 대조하기 바란다.
참고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발행한 지도보다는 중화민국인 대만에서 만든 지도에 강과 산의 표시가 잘 되어 있다. 다음 <그림 18>에서 황산의 위치를 확인해 보자.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