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논평>
댓글:
감사합니다. 405쪽을 보면서 드는 의문이 있어요.
한반도 팔도 지명이 고려 충숙왕 때 생겼다는건 고려사절요 등 高麗史의 문헌에 어떻게 나와있나요?
고려시대의 한반도는 하나의 道로 나올 수 밖에 없는 넓이일 듯....
세칭 평원왕 대덕 28년 즉 公年 586년에 長安城으로 遷都했다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때의 隋는 도읍이 장안성이 아니고 어디였을까요?
평원왕은 北朝의 北齊ㅡ北周와 南朝의 陳과 교류했으며 隋文帝가 북주를 멸하고 陳을 멸하기 3년전에 장안성으로 천도했다면 수문제는 洛陽에 도읍했겠네요?
이 때의 遼水는 압록수 즉 현 분하일까요? 황하일까요?
隋唐의 진격로로 보자면 황하로 보입니다.
논평: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어디에도 한반도에 고려가 위치했었고 도(道)란 행정구역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후대에 나타난 <동국여지승람>(1425)과 <해동역사>(1823)에 한반도의 지리지명들이 언급되어 있으나 이들 두 종류의 책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근거없는 허구의 소설로 가치가 없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근거없는 <동국여지승람>과 <해동역사>에 기초하여 한반도에 한자로 된 지리지명을 확대시킨 사람이 이중재다.
<고려사> 권35, 충숙왕 12년(1325) 8월 조(條)에 “왕과 공주가 한양(漢陽)에 행차하여 부원(富原) 용산(龍山)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에 천막을 설치하고 묵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절요> 권24, 충숙왕 12년 8월 조에도 “왕과 공주가 한양에 행차하였다”라고 하여 “한양(漢陽)”이란 지명이 최초로 나타나고 이는 마치 한반도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을 연상케 하고 있다.
동양사에 나타난 용산(龍山)은 모두 14곳이다. 그중 강서성(江西省) 만재현(萬載縣)에 위치하고 부주(富州)가 강서성 풍성현(豐城縣)에 있는 것으로 보아 충숙왕과 공주가 갔던 부원과 용산은 강서성이다. 또한 고려의 남경은 호북성 신주(新州)이기 때문에 강서성은 남경과 멀지 않은 곳이다. 대륙의 남경, 부원, 용산과 한반도 남경(한양), 용산과는 대칭관계의 각색(脚色)임에 틀림없다. 결론으로 충숙왕이 갔던 부원과 용산은 한반도가 될 수 없다.
고려는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의 복양(濮陽)에 동경(개경)과 산서성 남부 임분에 서경(평양)을 두고 신라의 강토뿐만 아니라 대진(발해)의 영토 일부까지를 차지한 동서 6천리 남북 6천리의 강역을 통치한 대제국이다. 물론 한반도는 사방 6천리에 포함시킨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8도(八道)를 창조한 사람은 1413년 이방원으로 마치 한반도에 고려가 있었던 것처럼역사를 왜곡, 날조, 조작한 사람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씨조선이 1만년 동이배달한민족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왕조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이다. 고려가 기록한 <고려실록>을 없앤 자들이 바로 흉악한 이씨왕조와 신하라는 자들이다.
요수 = 압록수 = 지금의 분하 혹은 분수는 고유명사이며 산서성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주춧돌(礎石)과 같은 개념으로 절대 바뀔 수 없다. 건물을 지으면서 주춧돌을 건드리지 말라. 황하를 지칭하는 이름은 모두 11개이며 상황에 따라 황하를 요수(遼水: 압록수)와 하수(河水: 황하)를 합쳐 요수라고 부른 정황이 간혹 보이기도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역사 왜곡이다.
북주(北周)의 도성은 서안이고 수(隋)나 당(唐)의 수도(首都) 역시 서안이며 고구려가 잠시 도성을 섬서성 장안으로 옮긴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고려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저자의 학술논문 <고려의 강역 연구>(제19집)가 출간되거든 참고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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