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왕검성의 위치

연나라 위만이 망명하여 빼앗은 곳은 산서성 남동부에 위치한 원곡(垣曲)에 있던 번조선(변한)의 왕검성이며 왕검성(王儉城)과 산서성 서남부 노룡(창려) 지역의 조양진에 있던 마한의 도읍지인 왕험성(王險城)이 서로 혼동되어 위만이 왕험성에 도읍했다고 잘못 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위만은 왕험성이나 평양성에 도읍하지 않았다.
첫째, 한무제가 위만조선이라 하는 번조선을 멸했을 때 산서성 남서부는 고구려의 영토로 고구려 제6대 태조궁 무열제(114-19BC)가 이곳 요서에 10성을 축성하여 한나라 군사를 방비했기 때문이다.
둘째, 왕검성(원곡)에서 왕험성(조양진)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대략 380리라는 이유 때문이다.
위만이 1천명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 서쪽에 있는 조선으로 갔다는 그 패수에서부터 조양진(왕험성)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576리이다. 1천명이 도보로 576리의 먼 길을 갔다는 견해는 설득력도 논리성도 찾아볼 수 없다.
왕검성은 번조선(변한)의 도읍지로 산서성 남동부 원곡이며 왕검성의 왕은 지일(地一)로 평양성에 있는 태일(太一)인 왕검을 보좌하는 좌현왕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평양성, 왕험성, 왕검성의 위치를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 <그림 2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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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63부
다. 왕검성의 위치

평양(성)은 진한의 도읍지로 산서성 임분시(臨汾市)이고 왕험성은 마한의 도읍지로 산서성 최 남서부 황하변의 조양진(朝陽鎭)이며 왕검성은 산서성 동남부 원곡(垣曲)으로 변한의 도읍지로 정리된다.
따라서 산서성과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가 단군조선의 중심 지역이었고 단군조선의 강역은 아시아 전역을 총괄한다.
특히 산동성과 산서성은 단군조선의 중심영역과 같아 변한의 영토에 포함되지만 지도상에 적절하게 표시할 수 없어 대강으로 삼한의 강역을 <그림 22>와 그리고 단군조선의 강역은 <그림 23>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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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64부
VII. 백악산 아사달의 위치
아사달의 위치를 추적하기 이전에 다음 인용글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아사(阿斯)를 음이 아홉(九)에 가깝고, 달(達)은 음이 달(月)과 같다 하여 마침내 구월산을 아사달이라고 하는 것이지마는 구월산은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지금의 信川郡)에 있는 산인데, 문화현의 옛 이름이 궁홀(弓忽)이요, 궁홀은 이두문의 ‘궁골’로 읽는 것이니,
궁골에 있는 산이므로 궁골산이라 한 것으로서, 마치 개홀(皆忽: 音 개골)에 있는 산이므로, 개골산(金剛山)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궁골산을 구월산이라 와전하였으며, 구월산을 아홉달산으로 억지 해석을 하여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망령되게 증거하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
라고 기술하여 신채호는 아사달을 구월산으로 해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문헌사료 어디에도 황해도 구월산에 왕검단군이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필자 역시 신채호의 견해에 따른다.

응달, 양달의 ‘달’이 땅을 의미하는 것처럼 아사달(阿斯達)은 이두어(吏頭語)로 ‘새로운 땅’ 혹은 ‘새로운 산’이란 뜻인데 아사달의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함경남도 백두산, 흑룡강성 하알빈 완달산(完達山), 하남성 낙양(洛陽), 강서성 남창(南昌), 하북성 창려(昌黎), 산서성 홍동(洪棟) 등으로 아사달의 위치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
아사달이 최초로 기록된 것은 <삼국유사>로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그곳을 궁홀산(弓忽山: 어떤 곳에 方으로 되어 있다)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이곳에서 나라를 다스렸다”고 말하고 있다.
백악산(白岳山)은 산서성 북부 고구려의 마자수(馬訾水) 즉, 압록수가 발원하는 말갈백산(靺鞨白山)을 뜻한다. 말갈백산이 백산, 즉 백악산이며 새로운 땅인 아사달은 백산 아래 위치한 오늘날의 산서성의 수도 태원(太原)을 가리키며 태원은 고구려의 졸본성이 위치한 곳이다.
악(岳)은 ‘큰 산’이란 의미로 악(岳)과 산(山)은 같은 뜻이다. 다시 말하면, 백산이나 백악은 같은 의미이다. ‘역 앞’을 역전(驛前)이라 하면 되지만 뜻글자와 소리글을 함께 사용한 우리말의 특성상 ‘역전 앞’, ‘축구 차다’, ‘미술 그리다’ 등과 같이 이중으로 표현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백산’이 ‘백악’이며 ‘백악’을 ‘백악 산’으로 중복표현 된 것이다.
당나라 시기에는 말갈백산이라 했으며 백평산, 지석산, 연경산(燕京山: 2,603m) 등으로도 불린 지금의 관잠산이다. 그런데 대만이나 중공에서 발행된 대륙지도에는 이 연경산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고 단지 2,603m의 산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이곳 백악산이자 말갈백산이며 지금의 연경산에는 백두산 천지와 비슷한 분원천지(汾源天池)가 있어 이곳에서 압록수(鴨綠水)가 발원한다.
고려의 서경인 평양이 있던 이곳 산서성의 광활한 영토를 명나라 주원장에게 빼앗기고 이성계가 한반도에 이씨조선을 세우면서 백악산(白岳山)을 백두산(白頭山)으로, 분원 천지를 백두산 천지로 이식(移植)하여 훗날 최남선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이라 한 불함문화를 창시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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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65부
계속해서 궁홀산(弓忽山)의 위치를 추적해 보았지만 궁홀산을 기록한 문헌사료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궁(弓)이란 글자로 시작된 지명으로 산서성 북부 지역을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는 있다.
“궁고현(弓高縣)은 한나라가 설치하였다. 옛 성은 지금의 직례 부성현(阜城縣) 서남이다”라고 적고 있으며, “부성현은 한나라의 창성현이다. 옛 성은 직례 기현 서북이다. 명나라와 청나라가 모두 직례 하간부(河間府)에 속하게 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간부는 제6장 1절 나항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산서성 남부 왕검성이 있던 원곡(垣曲)으로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 <그림 24)와 같다. 하간부 북쪽에 말갈백산과 태원이 위치한 곳임을 알 수 있다.
궁홀산을 금미달 즉 지금의 미달(彌達)이라 했다고 하였으므로 미달이란 지명이 있는지 확인해 보자. 유감스럽게도 미달이란 지명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미택(彌澤)이란 지명이 보인다. “미택은 산서성 삭현(朔縣) 서남에 있다. <위서/ 태조기>에 나라를 세운지 2년에 태조가 직접 마읍(馬邑)의 유현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추격하여 미택에 이르러 크게 쳐부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읍은 산서성 삭현의 옛 고을 이름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백악산이 말갈백산이며 새로운 산이나 땅인 아사달로 말갈백산과 태원을 뜻하고 궁(弓)자가 들어간 궁고현이나 미(彌)자가 들어간 미택은 모두 산서성에 위치한 지명으로 요약된다.
비록 궁홀산(弓忽山)과 미달(彌達)은 찾아볼 수 없지만 ‘궁고현’과 ‘미택’이란 지명은 산서성에 있던 지명으로 함경남도, 흑룡강성, 하남성, 강서성, 하북성 등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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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66부
인용문에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이라 한 것은 김견명이 <삼국유사>를 지을 당시인 고려 제25대 충렬왕 때인 1274년경의 시점으로 <명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명사>에 “后唐時 王建代高氏 兼幷新羅 百濟地 從居松岳 曰 東京 而以平壤爲西京 (후당 때에 고려 왕건이 고구려의 고씨를 대신하였고 산서성에 있던 신라와 백제 땅을 한데 합쳐 하나로 하였으며 송악으로 도읍을 옮겨 동경(東京)이라 하고 따라서 평양(산서성 임분)은 서경(西京)이라 했다”라고 적고 있다.
<고려사/지리지>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서경유수관 평양부는 원래 삼조선의 옛 도읍지이다. 당요 무진년(BC2333) 신인이 하늘에서 단목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이라 불렀다.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기자의 41대손 준(準)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1,0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망명하여 준의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 험을 검이라 쓰기도 한다. 즉 평양이다.)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한무제 원봉2년(기원전 109) 군사를 보내 토벌하고 4군을 정하였는데 왕험성을 낙랑군(樂浪郡)으로 삼았다. 고구려 장수왕 15년 국내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태조 원년(918) 평양이 황폐하여 염주(鹽州), 백주, 황주, 해주, 봉주 등 그 지역에 사는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대도호부가 되었다. 얼마 후에 서경(西京)으로 하였다.
광종11년(960) 서도(西都)라 불렸다. 성종14년(995) 서경유수라 불렀다. ... 인종 13년(1135) 서경 승려 묘청과 유참, 분사시랑 조광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원종 10년(1269) 서북면병마사 영기관 최탄과 삼화(현) 교위 이연령 등이 반란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성(城)들도 반란을 일으켜 몽골에 투항하였다.
몽골은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삼아 관리를 두고, 자비령을 경계로 삼았다. 충렬왕 16년(1290) 원나라가 서경과 여러 성을 우리나라에 돌려주어, 다시 서경유수관으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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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