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沃沮考, 薉[濊]貊考, 靺鞨考(옥저고, 예맥고, 말갈고)
“동옥저는 지금의 함경남도 땅이다. 한(漢)나라 무제 때에 현도군이 되었고, 한나라 소제(昭帝) 때에 낙랑동부라 일컬었다. 낙랑 동북에 있다고 해서 동옥저라 일컬었고 북옥저가 있기 때문에 남옥저라고도 했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옥저가 한반도 함경남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현도고’에서 밝혔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예맥고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예맥(濊貊)은 본래 북적(北狄)의 일종이니, 우리 땅 안에는 원래 이 이름이 없었다. 예(濊)는 땅 이름이요 맥(貊)은 종족이다. 동북쪽은 맥이라 하지만 정동(正東)은 맥이 아니다.
지난 역사책을 두루 살펴보면 예맥은 북부여(北扶餘) 땅인데, 뒷날 이것을 두막루(豆莫婁)라고 한다. 전한(前漢) 때에 북부여 왕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의 강릉(江陵)으로 옮겼는데, 강릉을 예(濊)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해부루가 옮겨가고 난 뒤 북부여 땅은 예맥이라 일컬어졌다.
고구려의 조상 또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중국의 여러 역사책이 모두 고구려를 맥(貊)이라 했다. 맥의 다른 종족으로 양맥(梁貊)이 또 있는데, 왕망 때에 고구려에게 멸망 당했다(薉[濊]貊者, 本北狄之種. 我邦疆域之內, 本無此名. 濊者, 地名也. 貊者, 種類也. 東北曰貊, 正東非貊也. 歷考前史, 薉[濊]貊者, 北夫餘之地也. 後世謂之豆莫婁. 前漢之時, 北夫餘王解夫婁東徙江陵. 此江陵所以爲濊也. 解夫婁旣徙, 而北夫餘之地仍稱濊貊. [高]句麗之先亦出夫餘, 故中國諸史並以[高]句麗爲貊. 貊之別種又有所謂梁貊者. 至王莽時, 爲[高]句麗所滅.)”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환공이 북쪽으로 고죽(孤竹), 산융(山戎), 예맥(濊貊)에 이르렀다”는 『管子(관자)』를 인용하고 있다. 앞의 현도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관자』에서 언급하고 있는 북[동북]쪽은 산서성 남부를 뜻한다.
유주이자 요서라고 하는 산서성 남부에 고죽국, 산융, 예맥이 있었으므로 산서성 남부에서 예맥의 위치를 찾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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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9부∼2)
16. 沃沮考, 薉[濊]貊考, 靺鞨考(옥저고, 예맥고, 말갈고)
“예(濊)는 땅 이름이요 맥(貊)은 종족이다. 동북쪽은 맥이라 하지만 정동(正東)은 맥이 아니다”라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약용은 『周禮職方氏(주례직방씨)』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직방씨는 사이(四夷), 팔만(八蠻), 구맥(九貊), 오융(五戎), 육적(六狄)의 인민을 맡았다”라는 내용이다.
본 인용문에서 맥은 9종이라 했지만, 구체적으로 9종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했다. 그런데 『禮記集說(예기집설)』에서 “9맥은 즉 구이(九夷)”라고 기술하고 있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구이(九夷)의 종류 역시 문헌사료마다 약간씩 다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그 종류를 열거하지 않겠다. 아무튼 정약용은 9종의 맥(貊)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수많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를 조사해 보았으나 9종류의 맥은 없다.
정약용은 “전한(前漢) 때에 북부여 왕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의 강릉(江陵)으로 옮겼는데, 강릉을 예(濊)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해부루가 한반도 강릉으로 옮겨왔다는 문헌사료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 역시 정약용의 근거없는 허구(虛構)이다.
정약용의 억설을 증명하기 위해 우선 예(濊)의 위치가 어디인지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예(濊) 역시 조선땅이다”라고 『太平寰宇記(태평환우기)』와 『通典(통전)』이 기록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패수를 경계로 했었다는 조선땅인 산서성 남부에서 예를 찾으면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이 같은 논리가 합당한지 지금부터 산서성 남부에서 예라는 지명이 위치했었는지 찾아보기로 하자.
『畿輔通志(기보통지)』에 “예하(濊河)는 평산현 북쪽에 있는데 방산(房山)에서 출원하여 동남으로 흘러 호타(滹沱)로 들어간다. 방산은 평산현 서북에 있고 예수(濊水)가 나온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예(濊)라는 물이 방산에서 출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방산(房山)에 대해 알아보자. “수도경에 이르기를 방산 산봉우리에 왕모사당이 있는데 세속에서 왕모산(王母山)이라 한다. ...예수(濊水)가 흘러나온다”라고 적고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도 “방산(房山)이 왕모산(王母山)”이라 하였다. 왕모산에 있는 ‘골짜기’, ‘굴’, ‘동굴’의 의미인 왕모동(王母洞)에 관하여 “산서성 양성현에 있는 왕옥산(王屋山)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보면 예수(濊水: 예하)라는 하천이 산서성 남부에 있는 왕옥산에서 발원한다는 것이다. 천연지형물인 예수(濊水)라는 하천으로 인하여 예(濊)라는 이름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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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9부∼3)
16. 沃沮考, 薉[濊]貊考, 靺鞨考(옥저고, 예맥고, 말갈고)
지금부터 예읍(濊邑) 즉 예의 도읍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고성(故城)은 지금의 하간부(河間府) 염산현(鹽山縣) 서북으로 옛 예읍(濊邑)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염산현의 기록을 보자. “춘추[시기] 제[의] 무체읍(無棣邑)이다. 한나라가 고성현(高城縣)을 두었다. ...지금의 이름은 구성진(舊城鎭)이다. 수나라가 염산(鹽山)으로 바꾸었다”라 하였다.
일부가 왜곡되어 있다. 무체현은 산동성에 있는 지명이다. 계속해서 구성진에 관한 기록을 보자. “하북 고양현 동쪽에 있다. 즉 고양고성(高陽故城)이다. 당시의 저용하빈(猪龍河濱)이다”라 하고 있다.
다시 저용하를 찾아보자. “하남성에 있다. 즉 연수(沇水)이다. 연수조를 보라”고 적고 있다. 연수를 찾아보았다. “산서성에 있으며 수원(水源)이 두 곳이다. 동쪽 수원은 양성현 서북 간봉령(干峯嶺)이다. 서쪽 수원은 원곡현(垣曲縣) 동북 역산(歷山)이다. 두 물이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황하로 들어간다”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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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제19부∼4)
16. 沃沮考, 薉[濊]貊考, 靺鞨考(옥저고, 예맥고, 말갈고)
『山東通志(산동통지)』의 기록을 살펴보자.
“제수(濟水)는 왕옥산(王屋山)에서 발원한다. ...공안국(孔安國)의 주(注)에 이르기를 제수의 원천(源泉)은 연수(沇水)가 흘러가서 제수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맞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연수(沇水)는 회주(懷州) 왕옥현(王屋縣) 북쪽 왕옥산(王屋山) 정상 기슭의 바위샘이 고여서 흐르지 않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현(縣)의 북쪽 3리에 이르며 그 발원지는 여럿으로 흘러넘쳐 못에 이르며 동남쪽으로 흘러 사수(汜水)가 되었다고 하였다. ...수경주(水經注)에 이르기를 제수(濟水)는 동원현(東垣縣) 왕옥산(王屋山)에서 발원하는데 첫 이름은 연수(沇水)라고 하며 온현(温縣)에 이르러서 비로소 제수(濟水)라 한다고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태평환우기』, 『통전』, 『기보통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수경주집석정와』, 『산동통지』의 기록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예(濊)는 예수(濊水: 예하)라는 하천으로 인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예수를 연수(沇水)라고 하였는데 방산(房山)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왕옥산(王屋山)에서 발원하며 황하로 들어가는 강이다.
예의 도읍지인 예읍(濊邑)은 예수가 출원하는 왕옥산 서쪽, 즉 하간부였던 지금의 원곡(垣曲)에 있었던 염산현 서북에 있는 지역이다.
지나인들은 역사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 문헌사료의 곳곳마다 기록을 왜곡 날조하고 있지만, 나무만 보지 않고 숲을 보면 옛 지리지명을 찾는 일이 전혀 불가능 하지만은 않다.

필자는 예읍이 단군조선 및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던 지금의 산서성 임분(臨汾)이라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예맥(濊貊)과 관련된 지리지명은 오늘날의 산서성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들 지명들을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12>와 <그림 13>과 같다. 따라서 한반도 강원도 강릉에 예(濊)가 있었다는 정약용의 주장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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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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