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문명은 강(江)을 중심으로 발생하였으며 그 강의 수원(水源)은 대체로 산(맥)에서 비롯된다. 산이 있으면 물의 근원이 되고 물이 있는 곳은 반드시 산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옛 지명을 찾는 데는 무엇보다도 강과 산의 위치를 찾는 일이 기본인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명제일 것이다. 강과 산의 자연지형을 인간이 옮기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왕조의 흥망과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강산과 고대 지명들이 많이 옮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남의현은 이러한 현상을 “한나라 때 요동군의 요동과 명나라 때 요동의 위치는 전혀 다를 수 있다”고 잘 설명해주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현상으로 인하여 하북(河北)인 산서성(山西省) 남부에 있었던 수많은 지명들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으로 옮겨지고, 산서성에 있던 요동이 요(遼: 916-1125)나라로 인하여 만들어진 요하(遼河)의 동쪽으로 비정되고 추정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수많은 문헌사료에 요(遼)라는 글자가 들어간 요주, 요산현, 요산, 소요수, 대요수(압록수) 등이 모두 하동인 산서성에 있는 지리지명들이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황하의 동쪽인 산서성을 하동(河東)이라 했던 것처럼 경도 110도로 나누어지는 섬서성과 산서성을 경계로 하여 산서성을 포함한 황하 우측 전체를 요동이라 하였고 좁은 의미의 요동은 산서성 남동부를 뜻한 것임을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근거하여 고구려의 요동의 위치를 밝히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기존 선행연구인 요동에 관한 학위논문을 살펴본바, 이병두는 요동군이 “난하와 갈석산을 잇는 장성(長城) 안쪽에 있었음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광명은 “요동군의 설립 단계의 요동의 동쪽 경계는 요하 유역으로 볼 수 있고 요동의 발전 단계인 소왕시기의 동쪽 경계는 청천강 유역”이라 비정하고 있다.
남의현은 “요동은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遼河(요하)의 동쪽’, ‘遼東都司(요동도사)가 있는 遼陽城(요양성)’, ‘遼東都司(요동도사) 관할지역’, 내몽골 일부를 포함하는 ‘만주지역’ 등의 의미가 있다”고 정의하였다.
김종서는 그의 논문에서 “요동군은 요하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 아니라 전국시대 요동국을 동서로 나누어서 그 동쪽에 설치한 군이다”라고 주장하였으나 요동국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나 요동국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못한 한계를 보였다.
김미경은 요동을 “요동 북부 지역과 요동반도”로 설정하였다. 백홍기는 요동을 요동반도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 선행 연구자들은 모두 요동을 요녕성, 요녕반도, 만주지역 등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동과 대칭되는 요서에 관한 국내 학위논문 8편과 국내학술논문 33편도 모두 살펴보았다. 이들 선행연구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요서지역으로 추정해 볼 때 요동의 범위는 요녕성의 범주를 크게 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고구려 요동요서 0815 요수(압록수, 분수)가 안시성을 거쳐 황하로 들어가는 산서성
중국에서 발표된 논문 역시 ‘고구려의 요동 요서’란 제목의 논문은 단 한편도 찾아볼 수 없으며 요서(遼西)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요서를 언급한 논문들이 대부분이다. 주로 고고학적 측면에서, 오늘날의 요녕성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유물들을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물들이 발굴된 내몽고와 요녕성 일대를 요서지역(遼西地域)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관윤화(關潤華)는 <1-3世紀初遼西民族分布格局硏究(1-3세기초요서민족분포격국연구)>란 그의 논문에서 “요서는 지리적인 개념으로 원래 요하의 서쪽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위염염(魏琰琰)은<明遼東鎭軍事聚落分布及防御變遷硏究(명요동진군사취락분포급방어변천연구)>란 그의 논문에서 요동(遼東)을 명대(明代)에 축조된 장성(長城)이 있는 요동으로 설정하고 있다.
요동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춘추시기(春秋時期:770-403BC))에 관중(管仲: 719-645BC)이 지었다는 <管子地數(관자지수)>편에 “초나라 여수(汝水)와 한수(漢水)에는 금(金)이 있고, 제나라 거전(渠展)에는 소금(鹽)이 있으며, 연(북연)나라 요동(遼東)에는 구운 소금(煑)이 있다”라고 하여 요동에서 소금이 생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요동이란 지명은 최소한 춘추시기에 존재했던 지명이며 요동이라 일컫는 곳이 당시 북연의 땅이었는데 그곳에서 소금이 생산되었다고 적고 있다.
두 번째 요동에 관한 기록은 <史記朝鮮列傳(사기조선열전)>으로, “한(漢)이 일어났으나 그곳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워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로 삼아 연(북연)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나라는 BC202년에 개국하였음으로 요동이란 지명은 춘추시기부터 한나라 개국까지 최소한 약 500년간 역사에 나타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漢書地理志(한서지리지)> ‘요동군’조에 “요동군은 진(秦)나라 때 설치했으며 유주(幽州)에 속한다”고 하여 요동이란 지명이 등장하고 있다.
네 번째 <隋書(수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배구가 앞서 예를 들어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인데 주(周)나라가 여기에 기자(箕子)를 봉(封)하였고 한(漢)에 이르러 3군으로 나누었으며 진(晉)대에 요동(遼東)을 통솔하였다”라고 양제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영토가 전에는 고죽국이였으며 요동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 사실을 <舊唐書(구당서)>와 <新唐書(신당서)>에도 똑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섯 번째는 <송사>에 서술되어 있는 요동이다. “고구려는 우(禹)가 구주(九州)로 나눌 때에 기주(冀州)땅에 속했으며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箕子)의 나라가 되었고 한(漢)나라의 현토군(玄菟郡)이다. 요동(遼東)에 있었으며 평양성에 도읍했다”고 <송사>가 기술하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고구려가 기주 땅인 요동에 있었다는 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고구려는 BC232년에 건국하여 668년에 패망한 900년간 대륙을 지배한 나라이다. 따라서 요동은 적어도 1,438년간 역사 기록에 나타난 지명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할 것이다.
함께 살펴본 5종의 1차사료들을 선행연구자들의 요동의 위치와 비교, 분석, 검토해본바, 필자는 ‘요동이 요녕성 요하의 동쪽이 아닌’ 기주이자 하동(河東)인 산서성 일대와 산서성 남부임을 발견하였다. 1차사료와 문헌자료를 정밀하게 검토한 방법을 택한 때문이다. 비정이나 추정이 아닌 오직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밝힌 고구려의 요동위치 확인은 민족사를 정립하는데 큰 의의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을 참조하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