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절. 일성이사금
일성이사금은 21년 재위기간 중 특이한 사건은 말갈과 장령(長嶺)에서 싸움이다.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4년(137) 봄 2월에 말갈이 변방에 쳐들어와 장령(長嶺)에 있는 다섯 개의 목책을 불태웠다. ...6년(139) 8월에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여 주민을 노략질하고 겨울 10월에 또 왔으나 천둥이 심하여 물러갔다. 7년(140) 봄 2월에 목책을 장령에 세워 말갈을 방비했다. ...9년(142) 가을 7월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말갈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이찬 웅선이 불가하다 하여 그만 두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말갈이 쳐들어온 장령의 위치를 추적해보자. “장령은 길림성 성(城)의 동쪽 200리에 있다. 일명 장광재령(張廣才嶺)이라 한다. 또 숭령(嵩嶺)이라고도 한다. 소백산맥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의 기록을 확인해 보겠다. “① 장령은 호남성 형동현(衡東縣) 동남쪽에 있다. ② 지금의 광서성 북유현(北流縣) 북쪽의 대용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료비판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신라 제7대 일성이사금 당시인 134∼154 사이의 길림성(吉林省)은 고구려의 영토로 신라의 관할지역이 아니며 호남성(湖南省) 역시 백제의 강역으로 신라의 통치와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말갈의 생활 터전도 아니다.
말갈이 활동한 지역은 대체로 황하 인근 지역이나 경도 35도로 갈리는 황하 북부 지역이다. 따라서 이 두 ‘지명 대사전’이 기술하고 있는 장령은 신라의 변방인 장령이 될 수 없으므로 배제(排除)한다.

계속 추적해 보자. “장령부는 발해가 설치했는데 관할하는 곳은 하주(瑕州)로 지금의 길림성 매하구시(梅河口市) 서남 산성진이다. 일설에는 지금의 길림성 화전시(樺甸市) 남쪽 소밀구이다. 금나라가 폐지했다”라고 하며 “당나라 시기 발해[대진]가 설치했다. 하주(瑕州)와 하주(河州) 두 주를 다스렸다. 지금의 봉천성 해룡현(海龍縣)에 있다.
② 요나라가 두었다. 지금은 폐지했다. 당시 봉천성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길림성이나 봉천성은 당시 고구려의 영토로 신라와는 관계가 없는 지역이다. 발해[대진]가 하주(瑕州)와 하주(河州)를 관리한 장령부는 감숙성 난주(蘭州)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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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79부
하주의 위치를 찾아보자. “하(瑕)는 춘추 진읍(晉邑)이다. ...수경주에 의하면 하동 해현(解縣) 서남 5리에 옛 하성(瑕城)이 있다. 말하자면 하(瑕)는 지금의 해주이다. ...산서성 임진현(臨晉縣) 동북 15리에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동은 황하의 동쪽으로 산서성을 가리키는 말이며 해주는 산서성 남부 천연염지인 운성염지(運城鹽池)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하(하주)는 산서성 남부를 지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주(河州)의 위치를 추적해 보자. “⑴ 하주(河州)는 전량(前涼)이 두었다. 지금의 감숙성 옛 난주(蘭州) 공창양부(鞏昌兩府)의 땅이다. 곧 서진의 도읍지로 했다. 후위 초에 포한진(枹罕鎭)이라 했다. 후에 하주(河州)를 설치했다. 북주가 또 포한군을 두었다. 수나라가 군을 폐지했다. 또 주(州)를 바꾸어 포한군이라 했다.
당나라 이궤(李軌)가 다시 하주를 설치했다. 후에 개명하여 안향군(安鄕郡)이라 했다. 또다시 하주라 했다. 송나라가 하주안향군을 두었다. 금나라 역시 하주라 했다. 원나라는 하주로(河州路)라 했다. 명나라는 하주위(河州衛)를 설치했다. 다시 하주라 했다. 청나라는 감숙성 난주부(蘭州府)에 속하게 했다. 민국은 도하현(導河縣)으로 바꾸었다.

⑵ 요나라가 두었다. 지금은 폐지했다. 당시 봉천성 경계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주가 여러 이름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요나라가 봉천성 경계에 설치했다는 기록은 왜곡이라 믿는다. 구체적으로 위치를 밝히지 않고 “경계”라는 표현은 논리성이나 설득력이나 객관성이 없다. 따라서 대진의 장령부는 지금의 감숙성 난주가 타당하다.
본고 제VI장 제1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1대 시조 혁거세거서간이 왕위에 오른 곳이 감숙성 난주이다. 따라서 일성이사금의 기사(記事)는 감숙성 난주에 있는 장령이라 주장하며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학술논문을 확인하기 바란다. 다음 <그림 19>에서 장령(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12년(145)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남쪽 지방이 가장 심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곡식을 옮겨 구제해 주었다. ...16년(149) 겨울 11월 천둥이 치고 도성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17년(150) 여름 4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이 되어서 비가 내렸다. ...20년(153)겨울 10월에 궁궐의 문이 탔다.
21년(154) 봄 2월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라고 적고 있다. 김부식은 일성이사금 왕의 장지를 언급하지 않아 묘지의 위치를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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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80부
제8절. 아달라이사금
“4년(157) 3월에 장령진(長嶺鎭)에 순행하여 국경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로하고 각 군사들에게 군복을 내렸다. 5년(158) 봄 3월에 죽령(竹嶺)의 길을 개통했다. ...14년(167) 가을 7월에 백제가 쳐들어와 나라의 서쪽에 있는 도성을 깨뜨리고 백성 1천명을 사로잡아 갔다.
…왕이 또한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싸움터에 이르니 백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간 남녀를 돌려보내고 화친을 청했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이 보인다.
왕이 장령진에 순행하여 국경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로한 곳은 앞의 <그림 19>에서 살펴본 감숙성의 장령임을 알 수 있으며 죽령의 길을 개통했다고 하였는데 “죽진[령]은 강소성 육합현(六合縣) 서북 50리에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강소성 서북이라 하였으니 안휘성(安徽省)의 어느 한 지역이라 주장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백제가 쳐들어와 나라(신라)의 서쪽에 있는 도성을 깨뜨리고 ...왕이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싸움터에 이르니”의 한수는 섬서성 영강현(寧羌縣)에서 발원하여 호북성을 경유하는 양자강(揚子江)의 지류를 뜻한 것으로 한반도의 한강(漢江)과는 무관한 하천이고
둘째, 따라서 당시의 전쟁은 서쪽 호북성에 있는 백제와 동쪽 강소성에 위치한 신라 사이의 접경지역에서 발생해야 한다는 이유 등이다. 죽령의 정확한 위치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대략의 방향을 제시하면 다음 <그림 20>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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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81부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7년(160) 여름 4월에 폭우가 내려서 알천 물이 넘쳐 인가가 떠내려가고 금성의 북쪽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8년(161) 가을 7월에 메뚜기떼가 곡식을 해치고 물고기가 많이 나와서 죽었다. ...17년(170) 가을 7월에 도성에 지진이 있었으며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변경에 쳐들어왔다. 18년(171) 봄에 곡식이 귀해 백성들이 굶주렸다. ...21년(174) 봄 정월에 흙비가 내렸다. 2월에 가물어서 우물과 샘물이 말랐다. ...31년(184) 봄 3월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아달라이사금은 31년 동안이란 긴 세월을 왕의 자리에 있었으나 김부식은 아달라이사금의 묘지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재위 7년에 폭우가 내려 알천의 홍수로 인하여 인가가 떠내려가고 도읍지인 금성의 북쪽 문이 무너졌으며 8년에는 아무것이나 닥치는대로 먹어 치우는 잡식성 메뚜기떼의 피해를 입었고 많은 물고기가 죽었으며 12년에는 아찬 길선(吉宣)이 반역을 꾀하다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했으며
14년에는 백제가 신라의 서쪽에 있는 두 성(城)을 쳐부수고 1천명의 백성을 사로잡아 갔으며 17년에는 도성에 지진이 일어나며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고 18년 봄에는 먹을 곡식이 없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며
21년에는 가뭄이 들어 우물과 샘물이 마르는 등 수많은 재난을 감수했던 왕이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김부식은 왕의 장지를 밝히지 않은 것으로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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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82부
제9절. 벌휴이사금
“9년(192) 여름 4월에 도성에 눈이 내려 깊이가 석자나 되었다. 5월에는 홍수가 나서 산이 10여 곳이 무너졌다. ...13년(196) 봄 2월에 궁궐을 다시 수리했다.
3월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에 궁궐의 남쪽에 있는 큰 나무에 벼락이 치고 또 금성의 동쪽 문에 벼락이 쳤다.
이달에 왕이 세상을 떠났다.” 벌휴이사금의 묘지가 어디인지 기록이 없다.
아달라이사금 시기처럼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고 궁궐의 문에 벼락이 치는 등 자연재난을 겪었던 왕이라서 김부식은 장지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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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강역 연구–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제83부
제10절. 내해이사금
“14년(209) 가을 7월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라(加羅)를 침범할 것을 꾀하므로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청했다. 이에 왕은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그들은 팔국의 장군을 쳐죽이고 포로 6천명을 빼앗아 돌려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포상팔국에 관한 원전문헌(原典文獻)은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명대사전에도 기록이 전무하다.
그러나 포상팔국의 위치 추적이 가능한 단서가 보인다. 포(浦)는 ‘물가’나 ‘바닷가’의 의미를 갖는 글자로 대륙에는 ‘포’란 글자가 들어간 지명이 모두 15곳이 나오는데, 사천성, 절강성에 2곳, 섬서성, 강소성에 6곳, 복건성 2곳, 감숙성, 호남성에 2곳으로 되어있다.
당시 강소성에 있던 신라와 절강성에 있던 가야의 강역으로 비추어 볼 때 포상팔국은 강소성, 절강성, 호남성, 복건성의 한 지역에 있던 나라로 이해된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에는 포상팔국이 있었다고 기록된 1차사료나 문헌자료는 없으며 역시 각종지명대사전 어디에도 그 같은 기록이 없다는 사실이다.

인용문에서 가라(加羅)는 가야(加耶), 가락(駕洛), 금관국(金官國) 등으로 달리 부르는 이름이며 가라를 기록하고 있는 1차사료는 <송서(宋書)>와 <남제서(南齊書)>로
<송서>의 기록에 “원가(元嘉: 송, 424∼453) 2년 …[왜왕] 찬(讚)이 죽고 아우 진(珍)이 왕위에 올라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치고 자칭 사지절도독 왜(倭), 백제(百濟), 신라(新羅), 임나(任那), 진한(秦韓), 모한(慕韓) 6국 모두의 군사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글을 올렸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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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