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 첫날 해맞이의 오랜 추억이 있습니다. 90년대 후반 기차를 타고 강원도 정동진(正東津)에 가서 해맞이를 하는 것이었지요. 당시 정동진은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달랐습니다. 정동진은 1995년 공전(空前)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모래시계’로 그야말로 한적한 바닷가에서 일약 유명한 명소가 되었지요.
96년부터 해맞이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찾는 곳이 되었는데 12월 31일 자정 무렵 청량리에서 정동진까지 가는 이벤트 열차를 타게 됐습니다. 밤을 새워 가면서 기차 안에서 퀴즈로 상품도 주고 중간에 작은 역에서 잠시 정차해 눈 덮인 산길을 짧게 걷는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밤을 새워 달려서 아침 일찍 정동진역에 도착했는데 추위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해돋이가 있기전부터 바닷가 행사장에선 록 밴드가 요란하게 음악을 틀고 사람들을 모았지만 도무지 함께 할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돌아오는 기차 시간을 정해져 있기에 몸을 따뜻하게 할 피난처가 필요했습니다.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카페 한곳을 들어갔더니 기타를 타고 온 승객들이 병든 닭처럼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더군요 동해를 바라보며 새해 첫날 해돋이 하겠다는 호기(豪氣)는 어데 가고 실내에서 따뜻한 볕을 쬐며 기차 탈 시간만 기다리던 걸 생각하면 싱거운 웃음이 나옵니다.
그후로 새해 첫 날 해맞이 명소를 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TV로 보면 낭만적으로 보이겠지만 살을 에이는 추위는 현실이거든요. 그때 이후로 새해 첫 날 일출을 보되 집과 가까운 곳을 찾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바닷가보다 가까운 산이나 높은 언덕에 올라가 나만의 해맞이를 즐기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2024년 갑진년(甲辰年)의 해맞이는 일산의 정발산(鼎鉢山)으로 했습니다. 해발 100m도 안되는 작은 동산이지만 접근성이 워낙 좋아서 부담없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을 오르다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정말 많더군요. 새해 첫 날의 해를 보고 싶어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은 모양입니다. 산등성이 주변에 어림잡아도 2천명은 넘어 보였습니다. 문제는 산이 워낙 낮다보니 나뭇가지들이 많아서 제대로 감상할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는 겁니다.

게다가 서울 등 수도권은 날씨가 맑아서 문제가 없을거라고 예보했는데 동편 하늘에 짙은 구름이 넓게 드리우고 있어서 솟아오르는 태양 보기가 쉽지 않겠다 싶더군요.
그래도 올해는 기왕의 일출 명소 동해안과 제주도보다는 운이 좋았습니다. 포항 호미곶엔 무려 3만명이 모였다는데 안타깝게도 짙은 구름으로 아침해를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사람들이 목을 빼며 기다리고, 서편 하늘에 선명하게 맺힌 달이 조금씩 희미해질 무렵 동녘에선 붉은 빛이 서서히 퍼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와~하는 탄성이 들리더군요. 잔 가지 사이로 태양의 둥근 상단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처음엔 붉은 빛으로 서서히 솟아오르던 태양은 가로 길게 드리운 회색 구름을 비집으며 하늘 위로 노란 빛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멀리 아파트들과 나무들, 희뿌연 구름을 배경으로 솟아오르는 태양은 마치 오랜 산고(産苦)를 이겨내듯 2024년의 황홀한 빛을 세상에 아낌없이 뿌려대고 있었습니다.



영롱한 일출의 장면을 촬영하는 사람들, 두손을 깍지끼고 소망을 기도하는 사람들, 모두 들뜨고 환한 모습입니다. 태양은 매양 똑같은 것이지만 갑진년 새해의 첫 태양이기에 이토록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이겠지요.
부디 2024년은 궂은 일보다는 기쁘고 아름다운 일들이 훨씬 더 많이 생겨나길 기원해 봅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빈의 스포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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