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 파리 : 서울 :   시작페이지로 설정 즐겨찾기 추가하기
 
 
 
꼬리뉴스 l 뉴욕필진 l 미국필진 l 한국필진 l 세계필진 l 전문필진 l 사진필진 l 열린기자 l Kor-Eng    
 
미국필진
·권이주의 美대륙을 달린다 (117)
·김동석의 워싱턴워치 (79)
·김수복의 자력갱생 북녘경제 (11)
·김중산의 LA별곡 (40)
·김창옥의 빌라레비 훨훨 (6)
·김태환의 한국현대사비화 (73)
·김현철의 세상보기 (98)
·노정훈의 세상속으로 (31)
·로빈의 스포테인먼트 (98)
·세등스님의 세상과 등불 (5)
·신필영의 삶의 뜨락에서 (34)
·오인동의 통일 고리-Gori (40)
·장호준의 Awesome Club (101)
·피터 김의 동해탈환 이야기 (52)
·한동춘의 퍽 환한 세상 (15)
·한종우의 시사아메리카 (13)
실시간 댓글
로빈의 스포테인먼트
소싯적 꿈은 축구선수였지만 정작 배구선수를 하고 만, 당근 기자노릇은 축구였으되 야구 육상 사격 역도 배드민턴 농구를 섭렵하다 방송영화계를 출입하며 연예와 씨름한 방랑의 취재인생. 전직 스포츠신문 기자가 전하는 스포츠와 연예하기.
총 게시물 98건, 최근 0 건 안내 글쓰기
이전글  다음글  목록 수정 삭제 글쓰기

박찬호와 레전드 최동원-선동렬

글쓴이 : 로빈 날짜 : 2010-12-22 (수) 11:20:02

박찬호가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스에 입단한 것은 그 자신뿐 아니라 많은 야구팬들에게 특별한 감회(感懷)를 일으키게 한다.

17년. 말이 쉬워 17년이지 메이저리그에서 17년간 선수생활을 했다는 것은 성적 여하를 떠나 기념비적인 일이다. 공교롭게 17은 수미쌍관(首尾雙關)의 법칙처럼 시작과 끝이 같은 박찬호에게 적용된다.

94년 1월 12일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LA 다저스와 계약할 때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역대 17번째 선수였기 때문이다.

텍사스 레인저스로 5년간 6500만 달러의 연봉대박을 터뜨린 박찬호는 허리부상 등으로 ‘먹튀’라는 비난을 받고 마이너리그로 추락하는 질곡(桎梏)도 있어고 샌디애고 뉴욕메츠 등 9개팀을 옮겨다니는 ‘저니 맨’의 수모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서며 식지 않는 열정을 과시했다.

 

17년간 기록한 통산 성적은 476경기에 출전해 124승 98패 평균자책점 4.36 탈삼진 1715개를 기록했다. 통산 승수는 아시아 출신 선수로는 최다승이며 최다 투구이닝(1993이닝)도 박찬호의 몫이다.

그가 못이룬 꿈이 있다면 김병현이 두 개나 갖고 있는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다. 하지만 우승반지는 단체경기의 속성상 본인의 실력 외에도 하늘이 허락해야 하는 꿈이기도 하다. 종목은 다르지만 NBA의 전설적인 파워포워드 찰스 바클리도 끝내 우승반지를 끼지 못하고 은퇴를 했다. 마이클 조던의 지위를 넘보는 ‘킹’ 르브론 제임스가 클리블랜드에서 7시즌을 보내고 올시즌 마이애미로 이적한 것도 우승반지의 열망 때문이다.

박찬호가 일본에 간 것은 더 이상 그를 탐내는 메이저리그 팀이 없었기도 하지만 마흔을 바라보는 그가 마이너리그에서 기약없는 부름을 기다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알려진대로 그의 부인 박리혜 씨는 재일동포 3세이다.

박찬호는 대표팀 시절 일본만큼은 꼭 이겨야 할 상대로 꼽았고 누구보다 애국심이 많은 선수로 평가되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재일동포 여성을 아내로 맞으며 좋든 싫든 일본에 친숙해졌고 그런 점이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하게 된 하나의 이유도 됐을 것이다.

어차피 메이저리그 지속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손쉬운 일본프로야구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며 아내와 자녀를 배려하는 아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의 선택은 개인적으로 최상의 것이 될 수 있다.

적잖은 네티즌들은 큰 실망감을 보이며 ‘왜 하필 일본인가?’라고 불만을 표시하며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쌓은 위업이 일본리그에서 추락할 위험성을 경고하는가 하면 ‘마지막까지 돈을 챙기려고 한다’, ‘선수의 마지막을 한국프로야구에서 하겠다는 약속은 공염불이 아니냐’는 비난을 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 박찬호 본인이 충분한 심사숙고(深思熟考)를 했을 터, 즉흥적인 감정을 섞을게 아니라 이해하고 격려를 빌어주는 것이 그로 인해 울고 웃었던 17년의 세월을 의미있게 마무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누가 뭐래도 박찬호는 시대가 선택한 스포츠 영웅이었다. 자질면에서 따지자면 최동원과 선동렬같은 이전 세대스타들이 뛰어났던게 사실이다. 이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못했던 것은 당시 아시아 야구를 수준미달의 리그로 관심밖이었던 상황도 있었거니와 혹여 관심을 표했더라도 27개월의 병역의무를 필하지 못한 선수들은 아예 데려갈 수가 없었기때문이기도 했다.

그럼 박찬호는 어떻게 갈 수 있었던걸까. LA 다저스가 편법(便法)을 썼기때문이었다. 일단 유학비자로 미국 입국을 시킨 후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지금같으면 유학비자로 취업을 한다는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비자의 융통성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다저스와 박찬호의 도박은 멋진 성공을 거뒀다. 박찬호는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병역면제를 받았고 그덕분에 공백없이 17년의 메이저리거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박찬호를 계기로 여러 메이저리그 팀들이 병역여부와 상관없이 우수 선수들을 스카우트했고 지금도 한국의 유망주들이 마이너리그에서 땀을 흘리며 메이저리그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박찬호는 성공한 메이저리거인 동시에 메이저리그 진출의 물꼬를 튼 주인공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최동원과 선동렬은 시대의 불운아(不運兒)였다. 많은 이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최동원은 한국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 일보직전까지 갔다. 1981년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그에게 공식적인 입단 제의를 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1981년 9월 17일 토론토가 23세의 오른손 투수인 최동원을 메이저리그 최초의 한국인 선수로 스카우트한다고 보도했다. 토론토의 팻 질릭 부사장은 “최동원은 아마 지금 당장 메이저리그에 나가도 통할 것”이라며 메이저리그 계약 제의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타임스는 “최동원이 제안에 관심을 보였지만 27개월의 군복무를 해야 하는 장애물에 직면해 있다”고 선을 그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병역이 걸림돌이 되어 최동원은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다.

젊은 세대들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모르지만 필자가 보건대 최동원은 반세기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위대한 선수였다. 롯데 유니폼을 입고 프로데뷔 2년차인 84년 그가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올려 우승을 거둔 것은 한국은 물론 세계야구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다.

당시 우승후보는 막강 전력의 삼성 라이온스, 비록 정규리그에서 팀의 50승중 27승을 챙기며 223탈삼진의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운 최동원이 있지만 전력상 삼성의 승리가 예상됐다. 그런데 롯데 강병철 감독은 1, 3, 5, 7차전에 최동원을 투입하면 4승3패로 우승할 수 있다고 무식한(?) 전략을 짰지만 3승3패후 7차전에 나온 최동원은 체력이 바닥인 상태에서 불굴의 정신력으로 완투승을 거둬 거짓말같은 우승을 엮었다.

 

최동원의 놀라운 활약이 국내 무대라는데 불만을 갖는다면 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의 활약상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미국 일본 등을 상대로 최동원으로 하여금 거의 매일 완투에 가까운 등판을 시키면서 세계 최강 쿠바와 맞닥뜨렸다.

당시 알루미늄 배트를 든 쿠바는 메이저리그 단일팀보다 전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예상대로 한국은 난타당했고 콜드게임패의 망신을 당할 판국이었다. 불펜에 있던 최동원은 순전히 콜드게임을 막기위해 7회 구원등판, 시속 157km의 불같은 강속구와 거의 1m에 가까운 가공할 낙차의 커브(폭포수 커브)로 3이닝을 퍼펙트로 막아 쿠바를 경악케 했다.

당시 쿠바 선수단은 최동원의 구위(球威)에 당황한 나머지 “최가 메이저리그 투수가 아니냐. 부정선수”라는 문제제기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기계도 견디기 힘들만큼 지나친 혹사(酷似)를 당한 최동원은 결국 90년 서른두살의 나이로 은퇴하고 말았다. 만일 최동원이 박찬호처럼 일찌감치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투수 로테이션의 보호를 받았더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족적을 남길 위대한 투수가 됐을 것이라는 예상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최동원의 4년 후배인 선동렬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묵직한 강속구도 일품이지만 탁월한 제구력과 다양한 구질로 ‘국보급 투수’라는 최상의 찬사로 일세를 풍미했다. 선동렬의 볼을 어찌나 치기 힘들었는지 그가 몸을 푸는 모습만 보여도 상대 타자들이 기가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최동원과의 공식 대결은 86년과 87년 모두 세 번 있었지만 1승1무1패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경기내용마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첫 대결은 선동렬의 완봉승, 두 번째 대결은 최동원의 완봉승이었다. 특히 87년 열린 마지막 대결은 15회까지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명승부였다. 놀랍게도 두 선수는 마지막 이닝까지 200개 이상의 공을 뿌리며 완투했다. 믿거나말거나같은 가히 전설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선동렬은 말년에 일본 주니치로 건너가 ‘나고야의 태양’이라는 별명속에 특급소방수로 활약했으니 아쉬운대로 유종의 미를 거둔 셈이다. 하지만 최동원은 참으로 불운한 스타였다.

지도자로도 그리 잘 풀린 케이스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한화 2군 감독을 지낸 최동원은 올 초 간암 투병을 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한때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현재는 한국프로야구위원회 경기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는 최동원의 현역시절 역투가 그리워진다.

 


차주범 2011-01-01 (토) 13:36:19
본문의 선동열 선수에 대한 묘사 중에 "탁월한 제구력과 다양한 구질로 ‘국보급 투수’라는 " 이란 대목은 사실과 다르군요. 선동열은 평생 두 가지 구종으로만 먹고살았습니다. 바로 직구와 슬라이더였죠. 그에게는 다양한 구질을 익히기 힘든 치명적인 신체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손가락이 워낙 짧아 여러가지 다른 그립을 사용해 공을 쥐지못하는 어려움이 있어 각종 커브볼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유연한 몸에서 품어져 나오는 직구와 슬라이더의 위력이 워낙 대단해 그것만으로도 타자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죠. 선동열이 무슨 공을 던질지 뻔히 알고도 못치는 경우였습니다. 마치 양키스의 투수인 마리아노 리베라가 커터(직구의 한 종류) 한 가지만으로 역사상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군림하는 것과 흡사한 경우죠.^^
댓글주소
앤드류임 2011-05-19 (목) 08:40:27
일견 차주범님의 말씀이 사실 같아 보이지만 본문의 내용이 틀리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선동열이 슬라이더와 직구로 평생 먹고 살았다는 표현이 사실과 거리 있어 보입니다.

선동열이 직구와 슬라이더로만 주로 던지며 마운드를 평정하던 시대는 한국에서 선수 생활할 때였고 심지어 이 시기에도 커브 섞어 던졌습니다. 직구와 섞일 때 위력도 있었죠.

일본에 건너가서는 다른 여러 구종을 던졌습니다. 원래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종으로 변하지 않고 횡으로 많이 변하는 구질이었습니다. 옆으로 휘는 변화구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의 타자들에게 통하지 않았죠, 첫해 참담한 시즌을 보낸 주된 이유였습니다. 그 이후 선동열은 짧은 손가락으로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포크처럼 공을 찍어 잡고 던지는 변화구들을 던졌습니다. 결과적으로 SF는 아닌데 궤적이 그와 유사한, 낙차는 크지 않지만 예리하게 아래로 꺾이는 구질의 공을 던지기도 하고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장착하게 됐죠. 슬라이더는 검지를 일부러 더 짧게 잡고 그립을 쥐게 되었죠. 커브는 원래 던질 수 있던 구종이구요. 

선동열의 변화구는 바로 그런 자신만의 그립 방식 때문에 다른 투수들과는 달랐습니다.

또 리베라의 경우, 컷 패스트 볼이 주무기일 뿐이지 결코 그 한가지로 먹고 살았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98마일 우습게 던지던 포심과 타자들이 커터인줄 알고 기다리는데 날아들어가던 투심이 없었다면 아마  그의 컷 패스트 볼이 전설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리베라의 전성기 시절 투구를 잘 보시면 포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차주범님 말씀대로 그의 커터는 알고도 못치는 공이었죠. 한가지 구종으로 먹고 산 투수를 얘기한다면 아마 체인지 업 하나로 팀 승리를 지켜내던 전설의 마무리, 트레버 호프만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체인지 업으로 유인구,승부구를 모두 삼았던 투수, 간혹 직구 던지다가 불끄러 나와 불지르던 소방수 트레버 호프만 말입니다.
댓글주소
앤드류임 2011-05-19 (목) 08:42:13
뭐 한가지 구종으로 먹고 산 투수들 중에 물론 너클 볼러들이 있죠. 보스톤의 팀 웨이크 필드, LA 다져스의 탐 캔디오티.... 이 선수들은 뭐... 워낙에 특이한 사람들이니 말할 것도 없겠죠.
댓글주소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수정 삭제 글쓰기

뉴스로를말한다 l 뉴스로 주인되기 l뉴스로회원약관  l광고문의 기사제보 : newsroh@gmail.com l발행인 : 洪性仁 l편집인 : 盧昌賢 l청소년보호책임자 : 閔丙玉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기아50133(2010.08.31.) l창간일 : 2010.06.05. l한국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산두로 210 / 미국 : 75 Quaker Ave. Cornwall NY 12518 USA
뉴스로 세상의 창을 연다! 칼럼을 읽으면 뉴스가 보인다!
Copyright(c) 2010 www.newsroh.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