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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의 스포테인먼트
소싯적 꿈은 축구선수였지만 정작 배구선수를 하고 만, 당근 기자노릇은 축구였으되 야구 육상 사격 역도 배드민턴 농구를 섭렵하다 방송영화계를 출입하며 연예와 씨름한 방랑의 취재인생. 전직 스포츠신문 기자가 전하는 스포츠와 연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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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감독과 어느 소년의 26년 인연(上)

글쓴이 : 로빈 날짜 : 2011-08-22 (월) 12:58:50

김성근 전 SK 감독을 생각하면 늘 애틋한 감정이 묻어납니다. 그것은 저의 고교시절 시작된 그이와의 특별한 인연때문일 것입니다.

명조련사. 불세출의 승부사. 데이터야구의 귀재..그리고 요즘 그이에게 붙는 헌사는 ‘야신(野神)’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입니다. 그이가 야신으로 불리게 된 것은 2002년 삼성 김응용감독과의 한국시리즈에서 펼친 명승부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전력이 뒤지던 LG와 드라마틱한 시리즈를 펼친 후 김응용 감독은 적장 김성근 감독을 일러 “사람이 아니라 무슨 신(神)과 대결한 느낌이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나이 칠순이 된 그는 여전히 다이아몬드의 고독한 승부사입니다. 비록 SK에서 전격 해고됐지만 또다시 화려한 부활을 하리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잡초처럼 거칠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그것이 김성근 감독의 야구인생이니까요.

제가 스포츠서울에 몸담았던 시절, 인터넷 칼럼으로 연재한 '흥야항야'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2002년 11월 올렸던 ‘김성근감독과 어느 소년의 26년 인연’이라는 칼럼을 통해 김성근 감독을 추억(追憶)하고자 합니다.

 

"야~아 밖에좀 봐. 누가 왔는지 알아?"

돌연 교실이 부산해졌습니다. 친구들의 호들갑에 소년은 창밖을 내다봤습니다. 운동장에선 야구부가 오후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감독인듯한 사람이 배팅볼을 쳐주고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요.

"근데 저 사람이 누구냐?" 친구녀석이 한심하다는 듯 말하데요."너 아직도 몰라? 김성근 감독이잖아"

"김성근감독? 아 국가대표투수로 유명했던 그 사람?"

"그래 바로 그 사람. 우리 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왔잖아"

76년 어느날이었지요.

서울의 충암고에 다니는 소년과 김성근 감독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김성근감독이 고교감독으로 부임한 것은 당시 학생들에게 커다란 반향(反響)을 일으켰습니다.

재일동포출신으로 최고의 왼손투수로 군림하다가 기업은행 등 실업팀의 지도자로 활동한 유명한 감독이 일개 고등학교 지도자로 온 것은 적잖은 뉴스였거든요. 충암고가 야구중흥을 위해 특급 지도자를 모셔왔던거지요. 정순명이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던 72년이후 충암은 이렇다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김성근감독이 부임하면서 팀 전력이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기세봉을 비롯해 조범현 장호연 이근식 정용락 김경갑 정병규 이태호 김동우 한진용 이성수 등이 주축을 이룬 충암은 이듬해 황금사자기에서 돌풍을 일으킵니다.

한동화감독이 이끈 강호 신일과의 8강전에서 8회까지 상대를 노히트노런으로 누르다가 9회말 어이없는 역전패를 당했지만 우승 전력이라는 말을 들었지요. 아니나다를까 8월 봉황대기에서 결승에 올라 광주진흥고를 물리치고 감격의 첫 우승을 차지합니다.

경기가 끝나고 동대문 야구장에서 나온 소년과 수백명의 학생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해 스크럼을 짜고 시내로 나갔습니다. 혹독한 박정희정권의 유신치하였지만 고교생들이 우승의 감격에 행진하는 것을 말릴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지요. 반정부 데모라도 난줄 알았으니까요. 경찰 패트롤카 한대가 안전문제를 우려해 호위하자 소년들은 더욱 신이 났습니다.

동대문을 빠져나온 소년들은 종로 6가부터 승리의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독립문을 무악재를 지나 응암동에 있는 학교까지는 15km는 족히 되는 거리였지만 승리의 기쁨에 취한 소년들은 지친 기색없이 달렸습니다. 드라마틱한 승리의 감격이 에네르기의 원천이었던게죠.

소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김성근감독이 신일고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충암과 신일은 신흥 라이벌로 많은 명승부를 연출하면서 라이벌 관계가 됐고 충암의 김성근감독과 신일의 한동화감독 역시 자주 대비됐거든요. 그런데 김성근감독이 신일의 사령탑으로 옮겨갔다니 놀랄밖에요.

더욱 흥미로운건 김성근 감독 부임후 얼마안가 충암의 신임사령탑으로 한동화 감독이 온 것입니다. 고교에서는 보기 힘든 감독 맞트레이드가 된 셈이죠.이래저래 충암과 신일은 숙명의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소년이 김성근감독과 재회한 것은 92년 봄이었습니다. 그 사이 소년은 대학을 졸업하고 스포츠신문 기자를 하고 있었습니다.운명의 신은 묘하게도 소년을 그해 야구기자로 만들었고 삼성 라이온스 담당을 맡겼습니다.

삼성의 사령탑은 바로 김성근감독이었습니다. 김감독은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OB베어스 창단코치로 부임했고 김영덕감독을 도와 원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듬해 김영덕감독의 사퇴로 후임감독을 맡아 5년간 지휘봉을 잡았고 88년 태평양 감독으로 옮겼지요. 그이가 삼성에 부임한 것은 90년 11월이었습니다.

  

▲ OB코치시절 이광환코치와 함께.

김성근 감독은 옛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이는 새로 온 담당기자가 자신이 13년전 우승시킨 고등학교의 학생인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삼성은 82년 원년리그때 좌절한 이후 11년째 애타게 우승을 노렸습니다. 간판스타 이만수와 '만딩고' 김상엽 이태일 류중일 강기웅 등 화려한 멤버를 자랑하는 삼성은 김성근이라는 명감독을 영입한만큼 당연히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요. 선수조련에 일가견이 있는 김감독은 제주도 출신 무명 오봉옥으로 하여금 그해 승률 100%의 대기록을 달성토록 지원,또하나의 스타탄생을 알렸습니다.

삼성은 이상하게도 선수 각자의 재능은 훌륭했지만 모래알처럼 흐트러졌고 해태와 같은 끈끈한 조직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가까이서 본 삼성의 실패이유는 인간미가 결여된 일등주의라는 독특한 분위기가 걸림돌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성은 진정한 해결책보다는 감독 경질을 전가의 보도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해 포스트시즌에서 롯데에 덜미를 잡힌 김성근감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해임통보였습니다.

소년은 감독에게만 책임을 덮어씌우는 구단의 비정한 처사가 안타까운 나머지 옷을 벗던 날,이런 글을 썼지요.

 

<삼성이라는 구단이 야구계에서 갖는 하나의 불가사의가 있다.화려한 네임밸류의 선수층,우수한 코치진,구단의 아낌없는 투자.이른바 명문구단의 3요소를 번듯이 갖추고도 우승과는 인연이 멀다는 점이다.

지난 11년간 우승의 기쁨을 만끽한 것이 85년 전후기 통합우승을 했을 때가 고작.당연히 성적부진의 책임은 감독에게 돌아갔고 어떤 이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는 인사의 시퍼런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성적부진~감독문책~후속인사. 이런 일련의 악순환은 삼성으로 치자면 지극히 익숙한 풍경이다.도대체 삼성은 왜 우승을 못하는가.전율케하는 인사의 칼날을 늘 면죄부로 쳐든 사이 방만한 이기주의와 무력한 패배감이 허깨비처럼 기생하고 있지는 않은가.

물샐틈 없는 조직관리.그러나 알량한 상식의 잣대에 삼성의 야구는 혹여 생명력이 훼손되지는 않았을까.

물론 삼성 고유의 인사권은 존중되야 한다.그러나 성적부진과 일부 선수와의 불화가 단지 희생양을 삼기위한 과장된 포장재였다면 김성근감독의 임기도중 퇴진이라는 구단의 패착은 반드시 검증되야 한다.

기실 삼성은 김감독 부임이전부터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의 모래알기질에 일부 프런트의 반목까지 겹쳐 항시 바깥으로 폭발할 수 있는 불씨를 안고 있었다.

해박한 야구이론과 데이터의 근간인 기록을 중시,컴퓨터사령탑으로 불리는 김성근감독이 막상 부진한 성적을 낳자 무책임한 험구가들은 '컴퓨터가 고장났다'는 식의 조소로 감독을 궁지로 몰아넣는데 주력했다.

김감독비판론자들이 즐거이 도마에 올린 타순의 변경시비도 따지고보면 고유의 용병술을 폄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야구도 기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과거의 통계와 현재의 컨디션을 고려한 감독이 매일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고심 끝에 작성한 오더가 그토록 쉬이 짓밟혀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경기에 지면 오더는 늘 동네북으로 전락했고 일부 선수 또한 자신의 부진을 모면하려는 얕은 방편으로 삼기 일쑤였다.

결국 김성근감독은 옷을 벗었다.그렇다고 그의 지도력마저 옷을 벗게 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옷을 벗긴 삼성구단의 짐만 늘어난게 아닐까.우승이라는,도저히 풀 수 없는 불가사의의 해결이라는...>(92년 10월 6일 스포츠서울 2면 SS취재석)

 

삼성은 이후에도 감독을 몇차례 경질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폈지만 이후로도 10년간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공교롭게 김성근감독을 상대로 21년간 못이룬 한국시리즈 우승의 한을 풀었으니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김성근감독이 없는 야구판과 인연이 닿지 않았을까요. 그해 가을 소년도 야구기자를 그만두고 연예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93년 백수의 여유(?)를 즐기던 김성근감독이 스포츠서울 객원기자로 뛰면서 우연히 한번 봤을뿐 다시 만날 일은 오래도록 없었습니다.

소년이 김성근감독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2002년 11월이었습니다. 예상을 뒤엎고 LG가 한국시리즈에 올라왔을 때였죠.

소년은 그사이 농구와 배드민턴기자를 하다가 사회팀장~사회레저부장을 거쳐 전문분야 취재가 가능한 대기자(大記者)로 막 발령이 난 상태였지요. LG의 놀라운 투혼을 보면서 만일 우승을 못한다면 그같은 돌풍을 견인한 김성근감독을 꼭 인터뷰하고 싶었습니다. 우승한 감독에게는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가해지겠지만 준우승 감독을 조명할 언론은 거의 없을테니까요.

26년전 홍안(紅顔)의 소년과 30대 청년(靑年)으로 만난 두사람은 이제 불혹(不惑)을 넘긴 중년의 기자와 환갑(環甲)을 맞은 초로(初老)의 감독이 되서 재회했습니다. 김성근감독은 짧은 기간 담당기자를 했을뿐인 소년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더군요.

반가이 악수를 하며 “어이구~모습이 여전하네” 일성(一聲)을 질렀습니다.

  

▲ 2002년 11월 12일 LG의 구리구장에서 김감독과 재회했을 때 장면입니다.

세월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인지 김감독도 희끗한 귀밑머리에 잔주름도 깊어졌습니다. 하지만 강건한 체구에 형형(炯炯)한 눈빛의 그이를 누가 환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소년은 김성근감독의 소회(所懷)를 들어보았습니다. 국가대표 기둥투수와 우승감독으로 명성을 날린 아마시절에 비하면 그이의 프로시절은 불운한 편이었습니다.

<글 사진=스포츠서울닷컴>

(下편 계속)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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