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 파리 : 서울 :   시작페이지로 설정 즐겨찾기 추가하기
 
 
 
꼬리뉴스 l 뉴욕필진 l 미국필진 l 한국필진 l 세계필진 l 전문필진 l 사진필진 l 열린기자 l Kor-Eng    
 
미국필진
·권이주의 美대륙을 달린다 (118)
·김동석의 워싱턴워치 (79)
·김수복의 자력갱생 북녘경제 (11)
·김중산의 LA별곡 (40)
·김창옥의 빌라레비 훨훨 (6)
·김태환의 한국현대사비화 (73)
·김현철의 세상보기 (98)
·노정훈의 세상속으로 (31)
·로빈의 스포테인먼트 (98)
·세등스님의 세상과 등불 (5)
·신필영의 삶의 뜨락에서 (34)
·오인동의 통일 고리-Gori (40)
·장호준의 Awesome Club (101)
·피터 김의 동해탈환 이야기 (52)
·한동춘의 퍽 환한 세상 (15)
·한종우의 시사아메리카 (13)
실시간 댓글
로빈의 스포테인먼트
소싯적 꿈은 축구선수였지만 정작 배구선수를 하고 만, 당근 기자노릇은 축구였으되 야구 육상 사격 역도 배드민턴 농구를 섭렵하다 방송영화계를 출입하며 연예와 씨름한 방랑의 취재인생. 전직 스포츠신문 기자가 전하는 스포츠와 연예하기.
총 게시물 98건, 최근 0 건 안내 글쓰기
이전글  다음글  목록 수정 삭제 글쓰기

비운의 닮은꼴스타 장효조와 최동원

글쓴이 : 로빈 날짜 : 2011-09-14 (수) 15:53:21

       

허망합니다.

슬픈 구월입니다.

한국 야구의 두 전설(傳說)이 일주일 상관으로 스러지다니요.

영원한 3할타자 장효조. 불세출(不世出)의 무쇠팔 최동원.

두명의 거인은 끝내 병마(病魔)를 이기지 못하고 야구팬들과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습니다.

장효조(55)와 최동원(53). 비단 야구팬이 아니더라도 동시대를 살아온 모든 한국인들에게 두사람은 너무도 친숙한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닮은꼴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타자, 다른 한 사람은 투수라는 포지션만 달랐을뿐 천부적인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 강인한 승부근성은 그들의 한결같은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지난 7일 장효조 전 삼성 2군감독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던 야구팬들은 14일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의 돌연한 부음(訃音)에 망연자실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들과 같은 시대를 호흡한 한 사람으로서 슬픔과 허무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당대 최고의 타자와 투수로 야구계를 주름잡았지만 선수생활 비운의 말년을 겪었고 지도자로 경륜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는 사실이 저를 아프게 합니다.

야구의 전설, 레전드..이들 단어외에 무엇으로 두 사람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올해 프로야구는 사상 처음 600만 관중시대를 열었습니다. 야구는 한국 최초의 프로구기종목이라는 영예로운 타이틀도 갖고 있습니다.

아마에서 프로로 넘어가던 과도기 그들이 없었다면 과연 프로야구가 오늘날의 위상을 구축했을지 의문입니다. 그만큼 두사람은 초창기 프로야구의 붐을 주도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미 아마시절 두 사람은 전성기를 구가(謳歌)하고 있었습니다. 루키로 입단해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간 것이 아니라 절정의 기량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 것입니다. 당시 장효조의 나이는 스물여덟, 최동원은 스물여섯이었습니다.

이들이 프로야구의 수혜(受惠)를 누린 게 아니라 프로라는 말을 달기도 계면쩍을만큼 엉성했던 프로야구가 이들의 덕을 톡톡히 본 것입니다.

장효조를 타격천재라고 부른 이유는 역대 한국야구에서 그만큼 정교한 타자는 없기때문입니다. 프로야구 데뷔후 3년간 타격왕이라든가 프로야구 최초의 3연타석 홈런, 8연타석 안타라는 기록들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대구상고시절부터 이미 최고의 교타자였던 장효조는 마치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볼을 집어넣는 것처럼 경기장 빈 공간을 날카롭게 찌르는 안타로 유명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어떤 형태의 구질도 맞춰 때린다는 뜻입니다.

어느 네티즌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장효조가 한 경기에서 안타를 3개치면 조금 컨디션이 좋은거고 2개치면 보통, 1개치면 안좋음. 아예 못치면 그 투수가 대단할정도로 대한민국 최고의 교타자였죠.”

장효조의 통산타율은 3할3푼1리.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역대 최고기록입니다.

또다른 네티즌의 회상입니다. “장효조는 아마츄어 시절이 더 화려했다. 타격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하겠다. 어느 대회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초반에 3할 6푼대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는데...중계방송을 하던 캐스터 왈...‘장효조 선수 ..이번 대회 초반인데.. 타율이 좋지 않아요..슬럼픈가요?’ 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한편 최동원은 어떠한가요. 한국 프로야구사는 물론, 세계 야구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챔피언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일군 것은 위대함을 넘어 불가사의한 것이었습니다. 롯데 유니폼을 입은 그는 84년 최강팀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에 무려 5차례 등판합니다. 구원투수도 아닌데 5차례 등판이라니요.

이중 4차례를 완투했고 3완투승, 1완투패입니다. 1승은 구원등판해 5이닝을 던지며 올린 것입니다. 최동원은 1차전에서 4-0 완봉승, 3차전에서 12-3 완투승을 거두고 5차전에서 2-3 완투패를 당합니다.

당시 시리즈 전적 3-2로 앞선 삼성 사령탑 김영덕 감독은 최동원이 5차전에서 완투패를 하자 6차전 승리를 확신했다고 하지요. 아무리 무쇠팔일지언정 정상 구위가 나올리 없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최동원은 5회에 구원등판, 9회까지 무실점으로 기록하며 세 번째 승리를 낚았고 마지막 7차전은 아예 선발등판해 6-4 완투승을 거두며 프로야구사에 영원히 남을 대기록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야구팬들 사이에 최동원을 해태의 선동열과 비교해 누가 낫냐며 갑론을박하기도 하는데 사실 공정한 비교는 어렵습니다. 기록상으로는 선동열이 우위에 있지만 다섯 살 많은 최동원은 정점에서 내려가는 시기였고 강타자들이 즐비한 해태에 비해 타선의 도움을 별로 받지 못한 점이 고려되야 합니다.

가령 19승을 거둔 86시즌 최동원의 방어율은 1.55에 불과한 짠물투구였습니다. 롯데 타선이 최동원 등판시 경기당 2점만 낸다면 승리를 약속받는 셈입니다. 그런데 당시 최동원은 14패를 기록했습니다. 롯데 타선이 얼마나 물방망이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당대의 위대한 타자와 투수는 그러나 선수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결성된 선수협 사태를 주도하면서 구단의 눈밖에 났고 88년 11월 최동원이 삼성으로, 한달뒤엔 장효조가 롯데로 트레이드되는 프로야구 최대 빅딜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결국 두 선수는 삼성과 롯데의 레전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은퇴식도 못하고 영구결번(장효조는 10번, 최동원은 11번)의 영예도 누리지 못한 채 쓸쓸하게 선수생활을 마감했습니다.

구단 중심의 야구계에서 미운 털이 박혔기때문일까요. 두 사람은 지도자로서도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장효조는 2005년 스카우트로 친정인 삼성에 복귀, 올해 2군감독을 맡으며 배영섭과 같은 신예 발굴을 했지만 최동원은 롯데와의 인연을 잇지 못하고 오랜 기간 야구해설가로 활동하다가 2005년 한화 투수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두명의 천재에게 더 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로선 아직도 청춘이라 할 50대 초반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병마는 그들의 발목을 잡고 말았습니다. 장효조와 최동원. 이같은 대선수들이 동시대에 나오려면 50년, 100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한 네티즌이 올린 애도의 인사를 전합니다.

“두분 하늘에서 멋진 승부 펼치세요.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수정 삭제 글쓰기

뉴스로를말한다 l 뉴스로 주인되기 l뉴스로회원약관  l광고문의 기사제보 : newsroh@gmail.com l발행인 : 洪性仁 l편집인 : 盧昌賢 l청소년보호책임자 : 閔丙玉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기아50133(2010.08.31.) l창간일 : 2010.06.05. l한국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산두로 210 / 미국 : 75 Quaker Ave. Cornwall NY 12518 USA
뉴스로 세상의 창을 연다! 칼럼을 읽으면 뉴스가 보인다!
Copyright(c) 2010 www.newsroh.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