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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의 스포테인먼트
소싯적 꿈은 축구선수였지만 정작 배구선수를 하고 만, 당근 기자노릇은 축구였으되 야구 육상 사격 역도 배드민턴 농구를 섭렵하다 방송영화계를 출입하며 연예와 씨름한 방랑의 취재인생. 전직 스포츠신문 기자가 전하는 스포츠와 연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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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국축구, 히딩크가 아니라 크라머가 필요하다

글쓴이 : 로빈 날짜 : 2014-06-24 (화) 02:04:11


 

홍명보호가 월드컵에서 최악의 졸전을 거듭하면서 비난의 융단폭격(絨緞爆擊)이 대표팀에 가해지고 있다. 스트라이커라는 표현이 부끄러울만큼 존재감이 제로인 박주영, 기름손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GK 정성룡이 특히 그렇지만 화살이 가해지는 핵심은 홍명보 감독이다.


 

난 애당초 홍명보가 대표팀 감독직을 맡는 것은 시기상조(時機尙早)라고 생각했다. 선수시절의 네임밸류만 믿고 맡기기엔 한국축구의 악폐(惡弊)와 관행(慣行)이 너무 깊고 크기 때문이다.


 

그가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해도 학연(學緣) 지연(地緣) 파벌(派閥)로 뒤얽힌 한국축구의 난맥상속에서는 절대로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2002년 히딩크의 성공으로 팬들에게는 외국감독에 대한 높은 기대감이 있는게 사실이다. 그는 세계적인 감독이고 일정부분 카리스마를 인정하지만 솔직히 히딩크의 성공은 감독의 역량이 아니라 한국축구의 고질적 병폐를 상당부분 무시했기 때문에 꽃피울 수 없었다.


 

지금 홍명보호에 대한 비난은 주로 인맥 학맥에 따른 특정한 선수들에 대한 편애에 가해진다. 감독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팀에 발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 상식선에서 용인해야 할 일이고 실력보다 다른 이유로 발탁이 된다면 그것은 권한(權限)이 아니라 전횡(專橫)이다.


 

감독의 문제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축구계, 권력을 가진 축협 행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들이 작용한다는데 있다. 힘있는 자들의 학연 지연 파벌이 대표팀 구성에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국내 감독들은 태생적으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의 영향권아래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히딩크와 같은 외국인 감독들은 비교적 그러한 점에서 자유로운 상황이다. 히딩크도 위기는 있었다. 2002월드컵 직전 대륙간컵과 유럽원정에서 프랑스와 체코에 연속 5-0으로 패하면서 ‘오대영’ 감독이라는 비아냥이 붙었고 장기휴가와 사생활이 도마에 올랐다.


 

그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소수이나마 믿어주는 팬들이 있었고 언론도 일정부분 냉정함을 유지한 덕도 있었다. 어렵게 외국인감독을 영입해놓고 몇 경기 결과로 흔드는 구태(舊態)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히딩크는 학연 지연 파벌과 무관하게 선수들을 골랐고 발탁된 선수들은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애썼다. 히딩크로서 운이 좋았던 것은 2002월드컵이 한국에서 개최됐고 건국이래 최대의 국민적 응원이 엄청나게 유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히딩크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외국인감독이 위기의 한국축구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는 의견이다. 한국축구는 외국인감독이 아니라 외계인감독이 와도 당장 달라질 수 없다.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월드컵을 일년정도 앞두고 있다면 외국의 명장이 와서 나름 자기 눈에 맞는 선수들을 선발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기월드컵과 최소한 한국축구의 10년대계를 위해선 국가대표 감독만이 아니라 유소년 대표팀부터 성인대표팀까지 아우르는 커미셔너급의 외국인 고문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겐 히딩크가 아니라 크라머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축구가 처음 외국인 지도자를 기용한 것은 68년 독일의 크라우첸 코치다. 그러나 그는 FIFA의 순회코치 자격으로 온 것이고 우리가 돈과 노력을 들여 영입한 지도자가 20여년뒤 크라머였다.


 


 

  


 


 

사실 크라머는 우리보단 일본이 먼저 인연을 맺었다. 크라머는 일본이 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동메달의 쾌거를 일궜을 때 공헌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아시아축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깊은 그가 한국축구의 세계화를 위한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당시 일본클럽의 기술고문이었던 크라머 영입을 위해 축구협회는 국제부장을 일본으로 보내 영입을 마무리지었다. 당시 축구기자였던 난 육순(六旬)의 독일노인을 처음 봤을 때 작은 체구이지만 날카로운 눈매에 강직한 성품이 느껴졌다.


 

그는 여생을 한국축구를 위해 바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당시 대표팀은 이회택 감독이 맡고 있었고 그는 만22세이하인 올림픽대표팀을 지도하도록 조정됐다. 당장 92바르셀로나 올림픽 티켓을 따는 것이 지상과제였는데 문제는 이 올림픽 팀도 김삼락감독이 있었기에 크라머는 ‘총감독’이라는 어정쩡한 보직(補職)을 받은 것이다.


 

자신과 통하지도 않고 별로 우호적이지도 않은 코칭스태프를 놓고 무슨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었지만 크라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한국축구를 위해 마지막 열정을 다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크라머는 한국축구의 가능성을 읽고 있었다. 공간의 효율적인 활용과 미드필드에서 압박하는 현대축구의 신조류를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 축구계는 너무도 협량(狹量)했다. 겉으로는 그의 충언을 듣는체 했지만 그가 없는 곳에선 씹고 다니는 이들이 있었다.


 

정말 답답하게도 우리 축구계는 그를 활용하는데 실패했다. 아니 처음부터 활용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론에 떠밀려 외국의 저명한 지도자를 영입했지만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있는 일부 축구인들은 크라머를 눈엣가시로 생각했다.


 

크라머도 나중엔 이같은 벽을 절감한 나머지 “왜 한국은 나를 써먹지 못하느냐. 원한다면 전국을 돌면서라도 지도자와 선수들을 가르치겠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크라머는 한국축구를 위해 준비된 지도자였지만 정작 한국축구는 그런 지도자를 받아들이기엔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한국축구는 바르셀로나 티켓을 따내며 28년만의 올림픽 자력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최대 공로자인 크라머는 올림픽 본선의 무대를 밟지 못했다. 크라머가 쓸쓸히 돌아간 후 두 번째로 영입된 외국인 지도자는 구 소련의 비쇼베츠 감독이었다.


 

88서울올림픽에서 최고의 스타 호마리우의 브라질을 꺾고 소련이 우승한 것은 그의 탁월한 전략이 있었다. 하지만 비쇼베츠 역시 한국축구의 배타적인 풍토(風土)를 힘들어 했다.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히딩크는 98년 월드컵에서 지휘봉을 잡은 차범근감독이 사상 유례없는 대회도중 경질(更迭)이라는 충격조치이후 대안으로 영입한 지도자였다.


 

히딩크는 분명 세계적인 감독이지만 앞서 얘기한대로 시기적인 행운도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크라머와 비쇼베츠 등 전임 외국인 지도자들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돌아가도록 한 우리축구계의 자기반성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히딩크가 크라머 시절 한국에 왔다면 얼마 안가 보따리를 싸고 귀국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히딩크의 영광은 당시와 비교할 수도 없는 척박한 풍토에서 헌신한 크라머와 같은 노선배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도 내 뇌리엔 썰렁하다못해 을씨년스러운 스탠드에서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선수들의 몸짓 하나하나를 응시(凝視)하던 열정(熱情)의 크라머가 떠오른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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