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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의 스포테인먼트
소싯적 꿈은 축구선수였지만 정작 배구선수를 하고 만, 당근 기자노릇은 축구였으되 야구 육상 사격 역도 배드민턴 농구를 섭렵하다 방송영화계를 출입하며 연예와 씨름한 방랑의 취재인생. 전직 스포츠신문 기자가 전하는 스포츠와 연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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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의 서울 3박4일

이노키와의 대결 막전막후
글쓴이 : 로빈 날짜 : 2016-06-05 (일) 18:16:21


220px-Muhammad_Ali_NYWTS.jpg

또하나의 스포츠 영웅이 스러졌다.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374세를 일기로 유명 (幽明)을 달리 했다. 나이를 먹으며 어린 시절 열광했던 스포츠 스타들이 하나 둘 사라져갈 때마다 가슴 한편이 저릿해진다. 내 추억의 한페이지가 함께 사라지는듯한 느낌 때문일까.

 

알려진대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M 클레이(Cassius Marcellus Clay). 1940년 켄터키 루이빌에서 태어난 그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따낸후 그해 12월 프로에 데뷔했다.

 

 

Boxing_light-heavyweight_1960_Olympics.jpg


1964년 당대최강 소니 리스튼을 맞아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Float like a butterfly, and sting like a bee)"는 유명한 어록을 남기며 7TKO로 물리쳤다. “흙을 의미하는 클레이는 노예 이름이라면서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한 그의 시대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는 주먹의 위력만큼이나 '떠벌이'라는 별명을 가질만큼 재기넘치는 언변(言辯)으로 한몫을 하던 복서였다. 상대선수를 몇라운드에 KO시키겠다는 예언을 종종 현실로 만들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67년까지 무패가도를 달리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말콤엑스의 흑인민권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징집영장이 나오자 베트공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抑壓)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는 말과 함께 징집을 거부했다.

 

그 결과, 타이틀 박탈은 물론, 프로복서 면허도 취소되었고 선수로서의 황금기였던 20대 후반을 3년여간 고스란히 날렸다. 알리가 차별받는 흑인들의 현실에 분노하고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타계하자 마치 위대한 흑인인권운동가인양 추앙(推仰)하는 것은 오바라고 생각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대체로 겁이 많다. 남들 앞에선 남자답게 배짱있는척 하는 사람은 실은 속으로 똥줄이 탄다. 복서가 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세계 타이틀을 열 번이상 방어한 한국의 내로라하는 복서가 은퇴후 집에 밤손님이 든 것을 알고 덜덜덜 떠는 바람에 그의 아내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나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직접 들었으니까..^^ 무하마드 알리는 그냥 전쟁이 무서웠던게 아닐까.

 

 

The_Beatles_and_Muhammad_Ali.jpg


각설(却說)하고, 19701026일 헤비급 1위 제리 쿼리와의 경기에서 3TKO승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한 알리는 70년대 조 프레이저와의 라이벌전, 또하나의 전설적 복서 조지 포먼과의 대결로 세계복싱의 전성기를 주도했다.

197138일 당시 WBC, WBA 헤비급 타이틀을 갖고 있던 조 프레이저(Joe Frazier)에 도전했다가 15회 판정으로 생애 첫 패배를 당했다. 세 번째 세계 타이틀 도전은 19741030일 성사됐다. 가공할 핵펀치를 지닌 조지 포먼(George Foreman)이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헤비급 금메달리스트였던 포먼은 프로데뷔후 거의 전 경기를 KO로 장식한 KO머신으로 유명했다. 훗날 마이크 타이슨을 놓고 호들갑스런 일부 언론이 핵주먹이라고 별명을 붙였지만 헤비급치고는 178cm의 단구인 타이슨에게 그런 별명은 과분하다. 그에 비하면 신장 191cm의 거한에 긴 리치의 무게감이 다른 조지 포먼이야말로 어울리지 않을까.

 

1973년 자메이카에서 펼쳐진 조 프레이저와의 대결은 그래서 흥미진진했다. 당시 챔피언 프레이저가 29전 전승 25KO(KO86.2%)였고 포먼은 37전 전승, 34KO(KO91.9%)를 자랑했다.

 

결과는 포먼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183cm의 프레이저를 마치 개구리를 패대기치듯 6차례나 다운시킨 끝에 챔피언이 됐다. 포먼은 그야말로 무적으로 보였다. 당시 관련 기억 한토막. 모 주간지 독자 낙서코너에서 장원으로 뽑힌 작품은 대략 이랬다.

 

포먼(Foreman)은 무적이다. 네사람(Four Man)이니까.” ^^

 

 

 

Muhammad_Ali_1966.jpg


아프리카 자이르 킨샤사에서 벌어진 알리와의 대결은 한국에도 생중계됐다. 당시 프로복싱은 국내에서도 최고의 인기스포츠였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프로스포츠가 거의 없었던 시절, 프로복싱 헤비급 대결은 국민적 관심사이기도 했다.

 

오랜 공백(空白) 끝에 재기한 알리와 가공할 KO머신 포먼과의 대결은 실로 흥미진진했다. 물론 전문가들은 팔팔한 20대 중반의 포먼이 아홉 살이나 많은 노장 알리를 여유있게 이길 것으로 점쳤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알리는 무척 영리한 복싱을 했다. 체력과 펀치력에서 포먼을 당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전성기 시절의 경쾌한 푸트워크도 어려웠다. 알리는 교묘한 클린치 작전으로 상대의 헛심을 쓰게 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잔펀치를 툭툭 먹였다.

 

포먼의 강력한 훅이 들어올때면 로프의 반동을 이용하면서 더킹(ducking)과 위빙(weaving)으로 피해나갔다. (훗날 포먼은 경기전 로프를 느슨하게 만들어서 알리를 유리하게 만들었다고 주최측을 제소했다. 상품성 높은 알리가 챔피언이 되는 것이 프로복싱의 흥행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뜻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자 포먼은 초조해졌고 아프리카의 무더운 날씨가 그를 빠른 속도로 지치게 했다. 운명의 8라운드. 허점이 보이는 순간 알리는 로프에서 빠져나와 번개같은 스트레이트와 훅을 작렬했고 회심의 라이트 훅을 포먼의 턱에 꽂아넣었다. 포먼은 고목나무처럼 쓰러졌다. 알리는 그렇게 서른네살에 또다시 위대한 챔피언의 반열(班列)에 올라섰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19766월이었다. 당시 알리는 일본의 프로레슬링을 이끌던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프로복서와 레슬러의 이종격투기간 대결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었다. 지금은 이종격투기가 독자적 스포츠로 펼쳐지지만 그때는 마치 사자와 호랑이의 대결처럼 이색적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서로 다른 무술간 대결이 종종 기획됐는데 예를 들면 킥복서와 쿵푸선수들이 맞대결을 하는 식이다. 내 기억으로는 킥복서들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는데 그것은 쿵푸선수들이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하는 반면, 킥복서들은 떨어져 경기하는 것도 능하고 상대를 붙잡으면 머리를 누른 채 니킥도 날릴 수 있었기 때문에 절대 유리했다.


알리는 스포츠엔터테인먼트의 길을 가고 있던 프로레슬링과의 대결이 엄청난 부수입을 가져올 것으로 계산한 듯 하다. 특유의 입심으로 이노키와의 대결을 최고의 흥행카드로 만들었기때문이다.

 

뉴욕에서 가진 이노키와의 공동회견에서 알리는 목발을 들고 나와 경기후 네가 쓰게 될 물건이라고 이죽댔고 이노키도 "(말만 앞세우는) 너를 우리 회사 홍보맨으로 쓰고싶다"고 응수하는 등 두 사람은 언론을 효과적으로 다루었다.

 

이노키는 알리와의 대결에 앞서 네덜란드의 올림픽 유도 무제한급 금메달리스트인 윌렘 루스카와의 이종격투기 대결을 펼쳐 관심을 끌었다. 루스카는 이노키에게 "알리와 싸우기 전에 나와 먼저 싸우자"고 도전장을 던졌다. 경기는 사전 각본에 따른 것이 유력하지만 마지막 순간 이노키가 루스카를 번쩍 들어 올려 허리찍기로 TKO시키는 장면은 리얼했다.

이종 격투기는 어떤 규칙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한쪽이 절대 유리해진다. 만일 이노키가 유도복을 착용했다면 루스카가 손쉽게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팬티 하나 걸친 이노키에게 루스카가 유도기술을 걸기는 애당초 불가능했다. 결국 이노키의 승리는 예정된 것이었다. 훗날 루스카는 아내의 병으로 돈이 필요해 사전 각본에 따른 경기를 했다고 고백했다.

아무튼 이노키와 루스카의 대결이 흥행(興行)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 덕에 알리-이노키 매치는 34개국 14억명이 시청하는 그야말로 '세기의 대결'이 되었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 먹을거 없다더니 도쿄에서 열린 알리-이노키전이 꼭 그랬다.

 

이노키는 알리 주먹을 한방이라도 맞을까 15라운드 내내 누워서 발차기만 했고 알리는 이노키가 악어라도 된양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빙빙 돌기만 했다..가끔 약올리듯 뭐라뭐라 소리치면서..하나는 입으로 권투하고 다른 하나는 누워서 허공에 발차기를 한게 언필칭 세기의 대결이었다. 애당초 복싱과 레슬링의 대결은 난센스다. 적당한 거리를 주면 복서의 주먹세례를 피할 수 없고, 붙잡히면 레슬러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니까.

 

알리는 이노키와의 대결을 '짜고 치는 고스톱'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전 각본에 따라 적당한 실전을 섞어 긴장감이 어우러진 격투기 쇼 말이다.

 

그러나 양측간 협의가 원활치 않는 바람에 약속된 경기를 할 수 없었다. 알리측은 부랴부랴 이노키에게 스탠딩킥, 던지기, 관절기 등 레슬링의 주요 기술을 금지하고 이에 대한 공표도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알리로선 이겨야 본전(本錢)이었지만, 당시 천문학적 액수인 600만달러의 개런티가 보장됐기에 응한 것이었다.

 

아마도 제한규정이 없었다면 이노키는 누운채 주먹을 피하고 발로 몸을 휘감아 쓰러뜨려 조르기나 꺾기로 알리의 항복(降伏)을 받아내지 않았을까.

 

팬들의 실망속에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고 알리는 거액의 개런티를, 이노키는 엄청난 유명세를 얻었다. 알리-이노키의 대결은 맥빠진 것이었지만 이로 인해 이종격투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K1, 프라이드, UFC 등 오늘날 종합격투기의 시대를 이끌게 한 계기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알리-이노키전의 수혜(受惠)를 입은 사람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바로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다.

 

2013년 월간중앙이 단독보도한 바에 따르면 알리가 이노키와의 대결을 마치고 한국에 오게 된 것은 국가정보원(당시 중앙정보부)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알리는 이노키와의 대결을 앞두고 재미태권도인 이준구 사범을 소개받아 이종격투기의 자문을 구했다. 국정원의 요원 한사람이 이준구 사범의 지인이었고 알리를 한국에 오도록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까지 온 마당에 한국에 들렀다 가자는 이사범의 제안을 알리는 흔쾌히 응했다.

초청조건 등 이면(裏面)에 뭐가 있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알리는 김포공항부터 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통해 수백만 서울시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일거수일투족이 TV로 중계됐다. 그와같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스포츠스타는 알리전에도 없었고 알리후에도 없었다. 아무리 전설적인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라지만 한국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미국의 복서를 거의 전 국민이 영웅처럼 떠받드는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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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가 MBC-TV 쇼에 출연했을 때 한국의 일부 여자연예인들이 기생처럼 교태(嬌態)를 떠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알리가 서울 도착후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대목이 있다. 이노키와의 경기에 대한 질문을 하자 알리는 "이노키는 매춘부처럼 시종일관 누워서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당시 통역이었던 이준구 사범이 당황해 머뭇거리자 알리는 "빨리 통역해"하고 명령하듯 소리치기도 했다.

 

알리가 아무리 독설(毒舌)을 늘어놓는 떠벌이지만 이노키를 매춘부에 비유한 말은 인신모독에 가까웠다. 이노키가 누워서 돈을 벌었다면 알리는 겁먹은 사슴처럼 빙빙 돌며 거액을 챙겼다. (사실 이노키는 유명세를 얻은 대신 재정적으로는 큰 적자를 봤다) 게다가 매춘부들은 또 무슨 죄란 말인가.

 

 

알리가 MBC-TV에 출연했을 때 쇼를 진행한 것은 땅딸이이기동이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코미디언이었지만 그도 알리 앞에서 겁나게 재롱(?)을 떨어준 기억이 난다. 34일간 알리는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고 떠났다. 갓쓰고 도포입고 TV에 나섰고 전방 부대도 방문했다. 1974년 피격, 타계한 육영수 여사 묘소도 참배(參拜)했다.

 

당시 박정희정권의 유신독재 치하에서, 민주와 자유가 옥죄인 한국인들의 응어리진 분노를 알리는 얼마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독재자의 전형적인 우민화(愚民化) 정책이었을 뿐이다. 훗날 전두환 정권이 광주항쟁의 비극을 덮고 국민적 분노를 돌리기 위해 국풍81이란 억지춘향 축제를 여의도광장에서 열고 프로야구리그도 출범시킨 것처럼 말이다. 알리가 알았든 몰랐든 그는 독재자 박정희를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이다.

 

그가 진정 흑인민권운동에 관심있고 개념있는 프로복서였다면 동양 끝머리에 있는 개발도상국의 독재자 초청에 썩은 미소 한번 날려주며 민주주의나 탄압하지 말라고 쓴소리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족(蛇足) : 70~80년대 서울에서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는 일명 박스컵으로 불렸다. 태국의 킹스컵(King's Cup)처럼 대통령이 박정희라고 박스컵(Park's Cup)이다. 당시 보도 되지 않았지만 유럽의 일부 프로축구클럽들은 우리는 독재자의 이름을 붙인 축구대회에 참가 할 수 없다고 초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박정희정부가 망신을 당했다. 개념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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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알리가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한 전설적인 대스타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마디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고 경쾌하고 아름다운 푸트워크로 복싱을 댄스처럼 느끼게 했다. 은퇴후 3년만에 찾아온 파킨슨병과 32년간 싸우면서도 사회운동에 관심을 기울인 그의 영면(永眠)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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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사진 www.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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