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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지만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맑고 향기로운 이야기들로 어두운 세상에 진리의 등불을 전하고자 합니다. 제주 약천사 혜인 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해인사에서 사미계수지. 직지사에서 구족계수지. 통도사 강원 졸업. 통도사 율원, 동국대학교 수학. 중국윈난대학교 졸업. 현 뉴욕 원각사 총무. 타이완 NGO단체 국제불광회 한국 제주협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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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세조 순치황제..천하를 호령함도 덧없구나

글쓴이 : 세등스님 날짜 : 2011-03-03 (목) 23:59:50

홍콩 영화와 김용의 무협소설을 보면서 자라온 세대라 그런지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은 나에게 로망이었다…. 드넓은 대륙과 유구한 역사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무용담(武勇談)….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매료된 경험이 있을 법한 중국 쿵푸영화….

중국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취미 중 하나는 고적답사(古蹟踏査)였다. 100번도 넘게 읽었던 삼국지, 조조와 유비, 손권 연합군이 천하를 놓고 일전을 벌인 적벽대전의 무대 장강 적벽…. 항상 춘추를 들고 다니며 전장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의리를 목숨보다도 귀히 여겼던 관우의 묘가 모셔져 있는 낙양 관림…. 하늘의 뜻이 약간 모자랐던 것일까 한실 부흥의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오장원의 별로 져버린 제갈공명의 묘가 모셔져 있는 사천 성도의 무후사….

이 외에도 중국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승고적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스님인 필자를 가장 설레게 하는 것은 불교유적과 설화이다. 중국 무협지에서 무림의 세계를 일컫는 강호(江湖)도 당시 중국의 유명한 대선사였던 강서에 주석하셨던 마조 스님과 호남에 주석하셨던 석두 스님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한 두 스님의 명성이 중원에 자자하여 강호(강서, 호남)에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모인 것에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중국의 불교문학은 광대하고 다채롭다. 중국 불교문학은 양도 방대하지만 신화적 요소와 종교의 도덕적 요소, 상상을 뛰어넘는 스케일이 곁들여진 미국의 헐리우드 SF를 뛰어넘는 스펙터클 그 자체이다.

오늘 소개할 내용은 황제의 자리를 초개처럼 던져버리고 홀연히 출가 수행의 길을 걸은 청나라 제3대 순치황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www.en.wikipedia.org

청나라는 중국의 만주족이 세운, 중국역사상 원나라 다음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호령했던 중국 최후의 왕조이다. 청 태조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중국의 동북부(지금의 만주 땅)를 장악하고 국호를 후금이라 칭했다. 그 후 2대 황제 청 태종 문제가 몽골지역을 점령하고 옛 원나라의 국새를 얻어 국명을 대청이라 개명하고 명나라의 혼란을 틈타 북경 진입에 성공한다.

그러나 중원제패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뇌출혈로 급서(急逝)하자 6살 난 아들이 즉위하여 밖으로는 명나라 잔손(孱孫) 세력을 대부분 평정하고 동남아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청나라 영토 초석을 놓고 안으로는 명나라 정치체제를 개혁 계승, 수많은 우수한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문무백관이 넘쳐나 천하태평을 이루게 하니 그가 바로 제 3대 황제 청 세조 순치제이다. 청나라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4대 황제 강희제 시대도 3대 황제 순치제가 중원지배의 기초를 닦아놓지 않았더라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1644년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자 순치제는 북경에 입성하여 자금성에서 또한번 즉위식을 올렸다. 청나라 황제 즉위선언문은 만주어, 한어(漢語), 몽골어 세가지 언어로 이는 곧 청 황제는 세 민족을 어우르는 대황제라는 의미이다.(우리나라의 ‘삼전도비’ 역시 이 세 언어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만주왕조인 청나라에서의 한인(漢人)과 몽골인의 대우는 사뭇 달랐다. 청 조정은 몽골인에게는 왕작을 주고 친형제처럼 대우하면서도 한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원래 만주와 몽골은 서로 동문동종(同文同種)이라고 여기며 긴 역사 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몽골문화를 무시하고선 만주문화를 이해하기 어렵다. 일찍이 청 태조 누르하치가 명나라로부터 독립 선언할 때 몽골의 문자를 빌려 만주 말을 표기한 사례만 봐도 두 민족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청나라 황실은 몽골의 왕가를 매우 높게 대우하였는데 태종이나 순치제의 섭정왕이었던 예친왕(睿親王)도 몽골 왕가에서 아내를 맞았으며 순치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만주족들과는 사상이 다른 황제였다. 7살에 자금성의 주인이 된 순치제는 어려서부터 중국의 문화를 매우 사랑하는 황제였으며 철저하게 중국적인 교양을 쌓으며 자라났다.

그의 거실에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고전에서부터 소설에 이르기까지 고루 갖춘 수십 개의 책장이 가득 차 있었고 장원출신의 서원문(徐元文), 오승사(吳承思) 등 젊은 학자들을 내정의 황제거실까지 불러들여서 정치, 문학, 미술, 문단 등에 대한 담소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또한 불교를 좋아하여 불교경전 읽기를 좋아하고 덕망 높은 스님을 초대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선황제 태종의 황후인 순치제의 어머니(몽골인)가 예친왕과 결혼을 한 것이다. 즉 형수와 시동생이, 그것도 황태후와 섭정왕이 재혼을 한 것인데 이는 몽골이나 만주에서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으나 중국사상에 물든 순치제로서는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조정의 한인(漢人) 관료들도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축하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철이 든 순치제는 그러한 문화에 심한 반발심을 느꼈다고 한다.

몽골 출신의 어머니 효장태후를 싫어하던 순치제는 예친왕이 죽자 자신의 몽골출신 황후를 트집을 잡아 폐하였는데 새 황후를 또 몽골왕가에서 데려오자 예의를 모르는 여자라며 냉대하였다. 그는 현비 동악씨라는 후궁을 총애하였는데, 그녀가 1660년(순치 17년)에 사망하자, 정치에 뜻을 잃었다. 얼마 안가 순치제는 그녀를 황후로 추시하였으나, 대신들은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61년(순치 18년)에 황위를 황태자인 3황자 현엽(강희제)에게 물려주고 24세 때 천연두로 붕어(崩御)하였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죽음에 대한 흥미로운 야사(野史)가 전해온다.

순치제는 동귀비(董貴妃)를 너무나 사랑하여 그녀가 곁에 없으면 밥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아끼던 동귀비가 덧없이 죽어버리자 황제는 죽은 동귀비를 황후에 봉한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옥좌를 내팽개치고 출가하여 산서성의 명찰(名刹) 오대산(五臺山)에 죽치고 들어박혀 버렸다. 아무리 조정대신들이 돌아오기를 간청해도 들은 척을 안하자 대신들과 황실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병으로 붕어했다고 발표를 했다고 한다.

 

www.cn.wikipedia.org 

청나라 황제들의 무덤 중 순치제의 무덤 안에는 신발과 부채만 들어있고 텅 비어있다는 말도 있는데 지금도 이 부분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출가설의 유력한 근거는, 사망의 경위가 너무 느닷없다는 것이다. 천연두는 유행을 하면 한꺼번에 하는데, 순치제 사망 당시에는 여름도 아니었고 천연두가 유행 중도 아니었다고 한다.

또 하나 근거는 순치제의 아들인 강희제의 행적과 관련이 있는데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던 강희제는 60여 년간의 통치 기간 여러 번 먼 곳에 있는 오대산으로 행차해 그곳의 절을 방문하였는데 방문이 모두 재위 전반기에 몰려있고 후반기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황제가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멀리 행차를 했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더 갈 일이 없어졌다라고 추론할 수 있겠다.

 

www.wikpedia.org

또한 절 집에서 전해 내려오는 순치제에 관한 설화가 하나 있는데 순치제의 전생(前生) 이야기이다. 어느 절에 노스님 한 분이 계셨다. 덕이 높고 수행이 깊은 노스님은 여간해 아프시지도 않고 대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 가셨다. 어느 날 짓궂은 손자 상좌(제자)들이 “노스님 언제 옷 벗으실 겁니까?”하고 여쭸다. 언제 돌아가실 것이냐 물은 것이다. 그 때 스님은 “뒷산 바위가 무너지는 때에 옷을 벗으마” 하셨다.

하루는 상좌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 하시고 사람 얼굴을 그린 후에 눈동자는 남겨두며 하시는 말씀이 “사십 년 후에 이 그림을 걸개로 하여 중원 천하를 돌아다니며 ‘자기 영(靈) 찾으시오.’하고 소리를 치고 다니면 내가 나타나 눈동자를 그려줄 것이라”고 하시고는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단정히 하고 좌탈입망(앉아서 돌아가심)하시니 갑자기 뒷산 바위가 무너져 내렸다.

사십 년 후에 청나라에는 순치황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마상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행하여 중원 천하를 통일한 뒤 자금성에 앉아 있는데 성 밖에서 문득 “자기 영(靈) 찾으시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에 이끌린 듯 소리 나는 곳을 보니 어느 스님이 걸개그림을 들고 있는데 눈이 없어 황제가 붓을 들어 눈동자를 그려주었다.

그 스님은 “사십년 만에 스승님을 뵙습니다.” 하면서 큰 절을 올리고 연유를 말하니 순치는 홀연히 자신의 전생을 깨달았다. 그 길로 곤룡포를 벗어 던지고 산으로 들어가 출가하며 시를 지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순치황제출가시(順治皇帝出家詩)’이다.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언제나 사회 비판에 노출되어 있고 때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고뇌까지 같이 짊어져야 한다. 특히 조계종 스님은 가족의 연(緣)을 끊고 속세를 떠나 독신 수행자(결혼을 허용하는 타종단도 있음)로서 살아가야 하고, 더군다나 깨달음과 해탈이라는 막연한 숙제를 안고 있기에….

깨달음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경계이다. 무슨 박사학위처럼 논문통과 한다고 덜컥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모든 선악과 시비, 나와 남이라는 분별조차도 없어진 그야말로 대자유인의 경지이기에 어떨 때는 범접(犯接)할 엄두조차 나질 않는다. 출가한 스님들 중 90% 이상이 10년 이내에 중도하차 한다. 나 역시도 지난 15년 동안 수많은 번민과 갈등이 있었다. 그럴 때 마다 번민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시가 있으니 바로 ‘순치황제 출가시’이다.


 

순치황제 출가시(順治皇帝 出家詩)

天下叢林飯似山 鉢盂到處任君餐

黃金白璧非爲貴 惟有袈裟被最難

곳곳이 총림이요, 쌓인 것이 밥이 어니

대장부 어데 간들 밥 세 그릇 걱정하랴

황금과 백옥만이 귀한 줄을 아지 마소

가사 옷 얻어 입기 무엇보다 어려워라.

朕乃大地山河主 憂國憂民事轉煩

百年三萬六千日 不及僧家半日閒

이내 몸 중원 천하 임금 노릇하건 만은

나라와 백성 걱정 마음 더욱 시끄러워

인간의 백년 살이 삼만 육천 날이란 것

풍진 떠난 명산 대찰 한 나절에 미칠 손가.

悔恨當初一念差 黃袍換却紫袈裟

我本西方一衲子 緣何流落帝王家

당초에 부질없는 한 생각의 잘못으로

가사 장삼 벗어 치우고 곤룡포를 감게 됐네

이 몸 본시 서천축(西天竺)스님인데

무엇을 인연하여 제왕가(帝王家)에 떨어졌나.

未生之前誰是我 我生之後我是誰

長大成人方是我 合眼朦朧又是誰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무엇이 내 몸이며

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뉘이런가.

자라나 사람 노릇 잠깐 동안 내라 더니

눈 한 번 감은 뒤에 내가 또한 뉘이런가.

百年世事三更夢 萬里江山一局碁

禹疏九州湯伐桀 秦呑六國漢登基

백년의 세상일은 하룻밤의 꿈속이요

만리의 이 강산은 한판 노름 바둑이라

대우씨(大禹氏) 구주 긋고(劃定) 탕임금은 걸(桀)을 치며

진시황(秦始皇) 육국 먹자, 한태조(漢太祖) 새 터를 닦았네

兒孫自有兒孫福 不爲兒孫作馬牛

古來多少英雄漢 南北東西臥土泥

자손들은 제 스스로 제 살 복을 타고났으니

자손을 위한다고 마, 소 노릇 그만 하소

수 천년 역사 위에 많고 적은 영웅들

동서남북 사방에 한줌 흙으로 누워 있네

來時歡喜去時悲 空在人間走一回

不如不來亦不去 也無歡喜也無悲

올 적에는 기뻐하고 갈 적에는 슬퍼하네

속없이 인간 세에 와서 한 바퀴를 돌아보니

애당초 오지 않았으면 갈 일 없을텐데

기쁨 또한 없는데 슬픔인들 있을 손가.

每日淸閑自己知 紅塵世界苦相離

口中吃的淸和味 身上願被白衲衣

나날이 한가하니 스스로 알아지니

이 풍진 세상 속에 온갖 고통 여의니

입으로 맛들임은 시원한 선열미(禪悅味)요

몸 위에 입는 것은 누더기 한 벌 원이로다.

四海五湖爲上客 逍遙佛殿任君棲

莫道出家容易得 昔年累代重根基

사해와 오호에서 자유로운 손님 되어

부처님 도량 안에 마음대로 노닐세라.

세속을 떠나는 일 쉽다 말을 마소

숙세에 쌓아 놓은 선근(善根)없이 아니 되네

十八年來不自由 山河大戰幾時休

我今撤手歸山去 不管千愁與萬愁

18년 지나간 일 자유라곤 없었도다

강산을 뺏으려고 몇 번이나 싸웠던가

내 이제 손을 털고 산 속으로 돌아가니

천만 가지 근심 걱정 내 아랑곳 할 곳 없네.

청나라 제위에 올라 18년간 천하를 호령했던 황제도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았는데 내 무슨 속세에 미련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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