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의 위안부기림비 열기가 너무 뜨겁다. 뜨거운건 좋은데 너무 지나쳐 부작용이 양산되고 있다. 뉴저지 포트리에선 올 상반기 세우기로 한 기림비 건립을 놓고 한인단체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소녀상이냐, 비석이냐 논쟁을 벌이고 주도권 다툼에 비방기자회견까지 여는 등 심각한 내홍(內訌) 양상이다.
미주의 위안부기림비는 2010년 10월 뉴저지 팰리세이즈팍(팰팍)에 세워진 1호 기림비와 2012년 6월 뉴욕 롱아일랜드의 2호 기림비, 2012년 12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의 3호 기림비, 올해 3월 뉴저지 버겐카운티 정부청사 앞에 세워진 4호 기림비가 있다.
앞서 밝힌 포트리의 기림비를 비롯, LA 인근 글렌데일에 또다른 기림비 건립이 추진되고 있고 뉴욕 플러싱에선 위안부기림길 명명(命名)과 기림비 건립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이밖에 필라델피아, 시카고 등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서 너도나도 기림비 세우기 열풍이 불고 있다.
기림비 건립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추악한 역사를 고발하고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이끌어내자는데 찬성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역사의 교훈이 되야 한다는 취지는 응당 박수를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것은 기림비가 개인이나 단체의 공명심(公明心)이나 홍보(弘報)로 이용되는듯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사실 기림비 열풍이 한인사회에 분 것은 10개월도 안된다. 지난해 5월 일본총영사와 우익정치인 4명이 경제적 미끼를 내세워 철거를 요구한게 미주류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팰팍기림비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그러자 기림비를 쳐다도 안보던 인사들이 찾아오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기림비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뉴저지의 작은 타운 팰팍은 위안부운동의 성지(聖地)처럼 인식되었고 어느 순간 이곳의 한인정치인들은 물론, 미국의 정치인들까지 기림비 건립의 최대 공로자가 되어 한국을 방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뉴저지의 시골정치인들이 속된 말로 뜬 것이다.
솔직히 이들 중 일부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이 보내는 찬사의 미사여구(美辭麗句)가 낯간지러울 것이다. 기림비 건립당시 거의 관심이 없었거나 심지어 반대한 이도 있기 때문이다.
한인들이 과반수가 넘는 팰팍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많다. 기실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것은 특정 커뮤니티 인사들이고 한인들은 그에 걸맞는 대접은 커녕 세금이나 내고 걸핏하면 벌금티켓이나 물어내는 봉이라는 자조적인 한숨이 나온다.
기림비는 2007년 미연방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위안부결의안의 정신이 잊혀지지 않도록 추모비를 세우자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위안부결의안 통과를 주도한 한인유권자센터(현 시민참여센터)가 2009년 7월부터 한인고교생 인턴들과 함께 기림비 모금운동과 서명운동을 전개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기림비에 대한 한인사회의 반응은 썰렁했다. 일부에선 “왜 창피한 역사를 밖으로 드러내느냐”는 볼멘 소리도 나왔고 앞서 말한대로 한인정치인의 반응도 뜨악했다. 건립비용은 1만달러에 불과했지만 모금과정이 수월치 않아 한인학생들은 땡볕에 비지땀을 흘리며 캠페인을 펼쳐야 했다.
무엇보다 기림비가 공공장소에 세워져야 했기에 지역정부와 미국의 정치인들을 설득하는게 큰일이었다. 학생들은 버겐카운티 정부를 찾아가 위안부 피해역사와 기림비 건립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때까지 서명운동을 통해 모은 700여명의 청원서와 연방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을 전달했다.
어린 학생들이 발로 뛰고 한인사회가 모금과 서명운동으로 힘을 보탰기에 기림비는 탄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4대 인권기념비가 있는 버겐카운티정부 청사 앞으로 들어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대안으로 한인들이 다수인 팰팍타운의 공립도서관 앞으로 변경되었다. 그나마 팰팍도서관 사서이자 위안부초상화가로 잘 알려진 스티브 카발로 화가가 제임스 로툰도 시장을 설득한 덕분이기도 했다.
어렵게 기림비는 들어섰지만 한적한 주택가 도로변에 녹이 슨 철망 펜스와 시야를 가리는 나무 등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팰팍의 유럽계 터줏대감들이 “특정커뮤니티(한인사회)의 비석을 왜 공공장소에 세우냐?”고 불만을 터뜨리며 철거를 종용(慫慂)했다.
누구하나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된 기림비가 언제 치워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구세주(救世主)처럼 등장한 인물은 백영현 1492그린클럽 회장이었다. 인근 페어론타운에서 꽃가게를 운영하는 그는 기림비의 황폐한 모습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무료조경을 자청(自請)하고 나섰다.

그는 “기림비는 전쟁범죄에 희생된 아시아 여성인권의 상징”이라는 논리로 철거압력에 대처하고 노골적인 협박에 대해선 경찰에 신고하는 등 강력한 대응으로 맞섰다. 기림비 건립 1년여가 지난 2011년 11월 마침내 로툰도 시장과 함께 예고없이 전격적인 조경작업에 들어갔다.
기림비 철거논란을 완전히 잠재우기 위한 일종의 거사(擧事)였다. 사재 수천달러를 들여 잔디를 새로 깔고 열다섯 그루의 사철나무를 펜스대신 둘렀다. 기림비 뒤에는 한국산 ‘미스김라일락’을 심고 오른편엔 ‘위안부 소녀’를 형상화한 분재 한그루를 정성껏 심었다. 기림비는 그렇게 지켜질 수 있었다.
팰팍의 정치인들이 기림비 수호에 적극 나선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노고는 어느 정도 평가해야겠지만 솔직히 이들이 조명을 받은 것은 일본이 자충수를 둔 지난해 5월이후였다. 기림비가 유명해지고 보니 별 볼 일 없던 팰팍 타운이 뜨고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명분과 실리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데 목숨(?) 걸고 지키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최근 가수 김장훈이 팰팍 기림비와 버겐카운티 기림비를 방문하고 돌아갔다. 그는 끊임없는 기부와 독도캠페인, 일본의 과거사문제를 고발해온 이른바 ‘개념가수’로 통한다. 기림비를 찾아 대국민 홍보용 ‘인증샷’이나 날리는 정치인의 부류와는 급이 다른 인물이다.
5월 뉴욕공연의 사전답사차 온 길에 위안부기림비를 찾은 그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전시관과 같은 ‘위안부관’을 뉴저지에 세우겠다는 뜻까지 천명했다. 기림비 앞에서 팰팍의 한인 정치인 두사람을 만나 조언도 듣는 등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고 블로그에 올렸다.
전후사정을 알 리 없는 김장훈은 그들을 기림비의 최대 수호자로 한껏 추켜세웠지만 정작 오늘의 기림비를 있게 한 주인공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한인들이었다. 뉴스메이커인 김장훈과 한인정치인들의 기림비 앞 사진은 그래서 찜찜한 느낌으로 남는다. 게다가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은 불편하다. 다짐을 위한 모습으로 이해하지만 참배장소에서 ‘파이팅’을 외치는듯한 포즈는 신중하지 못하다.

<사진=김장훈 블로그>
팰팍의 기림비는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극히 정치적인 상징이 되버렸다. 기림비를 세운 단체간에 소닭보듯 하고 자신들이 세운 기림비만 의미있고 다른 사람이 세운 기림비는 문제가 있다는 식의 폄하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왕이면 위안부기림비가 미 전역에 세워지기 바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림비의 정신을 제대로 확산시키는 작업이다. 기림비를 세우는 일에만 집착해 미주류사회에 소통(疏通)하는 일 없이 내부 다툼을 벌이며 진행하는 것은 안하느니만 못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가수 김장훈이 천명한 위안부관 설립도 신중히 먼 안목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앞장서서 주도하기보다는 미국의 시민사회 스스로 만들어가도록 하고 그들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다가가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