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 하느니라.”
“네?”
“목사는 목에 칼이 들어 와도 할 말은 해야 한다니까...”
“아, 네...”
선친께서는 무슨 연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슨 일만 생기면 어린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목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아주 귀한 명제(命題)를 초딩 때부터 알고 있었다. 비록 그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는 못하면서... 목사경력 20년이 지난 지금도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서 할 말을 못하는 목사는 일단 목사로 취급(?)을 하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사상가도 아니셨고 더군다나 소명(召命)을 받은 구약의 예언자의 한 분의 축에도 들지 못하시는 그냥 장삼이사(張三李四) 중의 한 분 이셨던 선친께서 왜 그런 일종의 한(?)이 서려있는 멋진 명제를 가르쳐 주셨는지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의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칼을 좋아한다. 날이 잘 선 칼을 보면 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어쩌다가 선물할 일이 생기면 날이 잘 선 부엌칼을 선물한다) 그리고는 목에 대본다. 도검류를 대할 때 마다 선친의 진지한 모습이 떠오른다.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대학가가 데모로 연일 바빴던 1973년도에 나는 그렇게 되고 싶었던 목사의 길을 가고자 광나루 언덕에 있었다. 시내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수도원같은 캠퍼스는 당시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는 대학들의 데모열기와는 전연 상관없이 거룩한 구도자(求道者)들이 모여서 명상하며 도를 닦는 선지 동산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감신대와 한신대 교수들이 삭발을 하며 학생들과 함께 데모하는 감동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유감스럽게도 장신대의 교수들은 데모를 하지 못하도록 말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목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선친께서 훈시(訓示)의 말씀을 하셨건만 신학대학교수들의 사려깊은(?) 처신(處身)을 이제 신학대학에 갓 입학한 하룻강아지가 어찌 이해 할 수 있으랴.
박동현 교수님의 예레미야원전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예언자의 길을 가야만 할 것 같은 감을 느끼게 되었다. 남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만 하다가 결국에는 비참하게 죽는 그 예언자말이다.
고 문익환 목사님이 방북 하신 직후 한국교계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고인을 때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특히 내가 속한 통합측의 어른들은 99.9%가 문목사를 비난했다. 역시 고인이 되신 이상근 목사님과 유경재 목사님 정도가 문목사의 행동은 훗날 오늘의 상황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역사가 평가를 할 것이라는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당시로서는 소신(所信)있는 언급을 하신 정도였다.
문목사가 김일성이를 포옹(抱擁)했다는 신문보도를 접한 남한 전체가 마치 뒤통수를 맞아 정신이 얼떨떨한 상황에 가친(家親)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목사가 김일성이를 품어야지, 그럼 누가 품나? ”
나는 아버지의 주장이 절대로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목사가 방북한 직후 주일 2부 설교시간에 존경하는 고 한경직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목사의 방북은 실정법 위반입니다”
당시 그 교회의 부목사였던 나는 그 주일 오후 1시에 있는 여장년 4부 성경공부시간에 약 400명의 권사님들, 장로의 부인들, 장로의 어머니가 출석하는 그 클라스에서 감히 하극상(下剋上)적인 발언을 하였으니 그 순간 이후 나는 붉으스레한 빨갱이 목사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문목사의 방북을 실정법 차원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예언자의 예언행위로 봐야 합니다. 어떤 정치인이나 어떤 비즈니스맨이 방북하면 감옥에 가야하는 것을 알면서도 하겠습니까?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노예언자의 민족 사랑의 몸짓으로 봐야 합니다.”
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 가스가 서울 시민들을 못살게 하는 당시였다. 갓난 아기를 업은 젊은 엄마가 외출을 했다가 아기와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의 교회 강단에서 순복음적(?)인 축복의 말씀을 설교해선 안되는 것으로 나는 받아 들였다. 내가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는 날이면 중부서 형사들과 안기부 요원들이 온다고 했다. 어떤 후배는 가슴이 조마조마 한다고 했고 기업의 경리부장을 했다는 어떤 동기 목사는 “신목사, 제발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마라. 그런 설교 좀하지 마라”고 당부를 했다.
고등학교 때의 은사님이 마침 안수집사로 계셨는데 당신은 당신의 제자가 목사가 되어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흐뭇하신 듯 했다. 어느 날 조용히 만나자 하시더니 하신 말씀이 “신목사, 설교도 좋고 다 옳은 말씀인데 당회장으로 나가려면 이미지를 관리해야 돼.”
이러시는 것이 아니신가?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셨다. 그렇지만 내 소신을 바꿀 수는 없었다. 당회장으로 못가면 못갔지...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의 소임에(?) 충실했다.
그 10년이 지난 후 한국 교계에는 방북을 못해서 안달이 난 것 같은 인물들로 가득 차 보였다.
미국유학이라는 소싯적 대망을 이루기 위해서 잘 나가던(?) 당회장급 부목사를 끝으로 도미하였으나 원래 학문에 소질이 있는 바가 아니니 한 2년은 두통약을 달고 다녔다. 그렇다고 목회자적인 자질이 충분한 것도 아니고...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어려운 이민목회가 잘 될 리가 없다. 공부도 시원찮고 목회도 변변챦고... 그럭저럭 10년을 보냈다. 그러면서 낚시도 해보았고...인생의 황금같은 40대를 그렇게 보냈다.....
그러는 중에 9.11테러를 뒷마당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마침 막내도 대학에 들어갔으니 별 볼 일 없던 미국의 환상을 훌훌 털어버리고 몽골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나는 기가 막힌 장면을 목도한 것이다.
몽골에서 세 번째 겨울을 보내는 어느 추운 날, 나는 나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는 전기(轉機)를 마련하는 불꽃같은 모습 앞에 어떤 희열(喜悅)을 맛본 것이다. 그것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눈밭에서 양들과 어울리는 목동의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차에서 내려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작동이 안 될 정도로, 추운 날씨인데도 한 마리의 양을 돌보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구르는 목동, 얼음밭 위로 삐져 나온 몇 개 안 남은 건초를 한 개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는 목동의 모습에서 나는 목자(牧者)의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아, 저것이 바로 목자로구나, 하나님이 내게 저 것을 보여 주시려고 몽골로 보내주셨구나...”
가슴이 메어지는 느낌이었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예언자는 안 할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한테 시키십시오. 저는 이제부터 목동으로 살겠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할 말은 안 하겠습니다.”
그렇게 외치면서 미국으로 돌아왔다. 별 볼일 없어 보였던 미국이 이렇게 좋은 나라요 행복한 곳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목사는 목에 칼이 들어 와도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선친의 말을 곱씹어 보면서 지금도 생각한다. 그 말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자칭 예언자의 길을 접고 순수(?) 목회자의 길로 접어든 지금 나는 무지하게 감사하고 행복하다. 쓴 소리를 하지 않게 되니 내 자신이 먼저 편안해 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부터 쓴 소리는 하지 않고 단소리만 하겠다고 다짐하는 나는 변절자인가? 거짓 예언자인가?
글=신재영 (포트리 한사랑교회 담임목사) moneu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