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1월 16일 월요일은 제 26회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날이다.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1월의 세 번째 월요일을 연방 공휴일 킹 목사의 날로 기리고 있지만 사실 미국 전역에서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년 전이다.
이하 사진 www.en.wikipedia.org
이유는 물론 미국 사회 근간에 깔려있는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다. 킹 목사의 날은 80년대 초 레이건 대통령의 주창으로 1986년부터 기리기 시작했지만 각 주 의회에서 이 연방 조례 통과를 차일피일 미뤘고 가장 늦장을 부린 유타 주에서는 2000년에야 기념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1929년 1월 15일에 태어나 불혹(不惑)의 나이를 일년 앞둔 1968년 4월 4일에 암살(暗殺)되기까지 킹 목사의 삶은 현대 미국 역사를 바꾼 한 축을 이룬다. 어째서 수많은 흑인 지도자 인권 운동가를 마다하고 킹 목사가 가장 유명한가에 대한 이유는 그의 비폭력 정신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도 내밀라는 설교를 예배 시간에 늘 했다는 킹 목사는 기독교 정신 이외에 인도의 정신적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정신을 크게 존경하고 생활에서 실천하려 노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혼란의 세대 1960년대 미국 주류사회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흑인들의 분노가 백인들의 기득권(旣得權) 침해를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고 이런 상황에 따른 사회 불안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 미국이 내전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까지 우려를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킹 목사가 이끄는 소위 프리덤 라이더(Freedom Riders)들은 비폭력 정신에 의거해서 이성적인 저항을 실천하였다.
물론 킹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박애 정신을 설파한 것도 주류 사회의 우려를 없앤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즉 킹 목사가 자칫 잘못하면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을 주류 사회 담론으로 승화를 시킨 점이 미국인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이고 그의 탄생일이 연방 공휴일까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일부에서는 킹 목사의 최후를 예수의 십자가 수난에 비교를 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과 희생을 감지하고도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친 상황과 킹 목사의 최후가 비슷하다는 이유에서다.
킹 목사는 1968년 3월 29일 테네시 주 멤피스 시로 향했다. 같은 시청 공무원이지만 백인 청소부와 흑인 청소부들에 대한 차별이 너무 심한 것에 반발하여 흑인 청소부들이 집단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당시 흑인지도자 중 가장 존경 받는 킹 목사를 초청했다.
문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도 바로 같은 장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킹 목사의 거주지 조지아 주 애틀랜타나 흑인들이 집단 거주지 남부에서는 공공연히 암살 시도를 하기가 아무리 파렴치한 KKK단이라 해도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멤피스는 상황이 달랐다. 흑인들이 다수 거주 하기는 해도 남부에 비해 소수였고 백인들이 아직도 노예주인 행세를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지역이었다.
킹 목사가 흑인 청소원들의 초청을 수락하고 멤피스로 발길을 옮겼을 때 주위 모든 사람들이 극구 만류를 했다. 심지어는 미국 정보기관 FBI에서도 사람을 보내 암살 시도 징후(徵候)가 있으니 여행을 취소하라고 엄중한 경고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킹 목사는 보좌관들이나 정부 요원들에게 자신의 삶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미국 전체를 위해 바친 것이라고 말하며 멤피스로 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 목사가 죽음에 초연(超然)했던 것은 아니다. 킹 목사와 마지막 밤을 보낸 사람들 중 하나인 제시 잭슨 목사는 그의 회고록을 통해 4월 3일 밤 운명의 로레인 모텔의 분위기를 증언하였는데 킹 목사가 그토록 불안해 한 것은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저녁 11시 경이 되자 킹 목사는 보좌관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홀로 밤새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운명의 4월 4일이 되자 오히려 차분해져서 서거하기 직전까지 그날 밤 행사에서 연주할 찬송가까지 선곡을 했다.
▲ 킹목사가 저격당한 모텔 www.en.wikipedia.org
모텔 2층 발코니에 나간 것은 오후 6시, 불과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저격자 제임스 얼 레이가 쏜 흉탄이 그의 머리를 관통해 가슴까지 헤집어 놓았다. 암살범의 위치가 킹 목사의 위치보다 높은 곳이어서 총알이 얼굴을 뚫고 목을 지나 내장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병원 응급실에 후송(後送)되었으나 1시간 만인 오후 7시 5분에 세상을 뜬다.
스스로 죽을 것을 감지하고도 대의를 위해 삶을 바친 킹 목사가 미국에서 인종을 초월해 존경을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