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나와 보니 베란다에 손님이 있었다. 꼬마 라쿤이다. 베란다 천장 아래 공간에 사는 모양인데 나왔다가 딱 걸렸다. 엄청 귀엽다. 기둥에 매달려 오도가도 못하고 발발 떤다. 평소에는 사람이 없으니 안심하고 나왔을 것이다. 아이들은 건드리면 할머니한테 죽는다며 멀리서 바라만 봤다. 너구리는 처음 나왔는지 오버행 부분을 넘지 못했다. 지쳐보였다. 네이슨은 너구리가 떨어질 것 같다며 담요를 들고 접근했다. 너구리를 유인하려고 개 비스켓을 들고 가까이 가니 너구리가 겁에 질려 으르렁거렸다.
어이 네이슨 그러지 말라구. 애들도 안 그러는데. 몇 번을 시도하다 포기하고 아침을 먹으러 들어갔다. 모닝커피와 와플, 계란후라이로 아침을 먹었다. 중간에 보니 너구리가 없었다. 아이들 얘기로는 베란다 천장 틈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었단다. 너구리가 힘이 달려서 못 올라갔던 게 아니라 자기 서식지를 들킬까봐 염려했던 모양이다. 야생 너구리는 보통 2~3년 수명인데 애완 너구리는 20년까지도 산단다.
오늘은 보트를 타고 물놀이를 갈 계획이다. 다윈의 보트는 이든 아일(Eden isle) 선착장에 보관돼 있다. 말 그대로 에덴 동산 같은 곳이다. 이 곳의 관리와 유지는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한다고 했다. 메모리얼데이 연휴라 사람이 많았다.
물놀이를 물가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트 타고 나가서 수십 피트 깊이 물에 뛰어 든다. 누들이라고 표현하는 기다란 스티로폼 하나 들고 나도 물에 뛰어 들었다. 누들의 부력(浮力)이 좋아서 물에 떠 있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온갖 다양한 포즈로 다이빙을 했다. 나이도 잊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는데 내일 근육통에 시달리지 않을까 모르겠다.
저녁으로 카레를 준비했다. 모두들 기대하는 분위기다. 9인분 밥을 준비하는데 어제의 경험도 있고해서 밥을 냄비 두 개에 나눠서 했다. 등산 다닌 경험으로 냄비에 밥 짓는 것이야 문제 없다. 월마트에 간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김에다 밥을 싸서 줬더니 아이들은 맛있다고 잘 먹었다. 김치까지 얹어 줬다. 어제 짜장면 만들 때 김치통 뚜껑을 열었는데 콜튼이 아 냄새 좋다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김치 냄새를 생전 처음 맡아 봤을텐데. 선입견이 없는 아이라서 그런가? 아무튼 김치는 맛 있는 것이고 김치 냄새도 좋은 것이라는 것을 미국인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카레 재료를 준비하는데는 네이슨 엄마와 콜튼이 도왔다. 콜튼 이 녀석 은근히 붙임성 있고 착하다. 재료를 볶고 카레가루 푼 물을 붓고 큰 솥에 끓였다. 결과는 대성공. 모두들 너무 맛있단다. 그냥 예의상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입맛이 까탈스럽다는 제이제이도 자기는 평소 쌀을 잘 안 먹는데 이번에는 다르다고 말했다. 네이슨 엄마는 나보고 일하러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농담을 했다. 누룽지로 숭늉까지 끓여줬다. 코리안 디저트라며. 맛 있었다는 얘기를 식사 후에도 몇 번이나 들었다. 네이슨은 자기는 꼭 한국 가서 살 거란다.
저녁에는 낚시를 나갔다. 다윈, 네이슨, 티나, 콜튼, 나 다섯 명이 갔다. 보트로 호수 가장 자리에 나가 낚시대를 던졌다. 보트에 있는 GPS에는 어군 탐지기도 있는지 바닥까지의 깊이와 수온, 물고기 위치가 나왔다. 내가 짐짓 모르는 척 했더니 콜튼이 내게 낚시대 사용법을 설명하며 바늘에 미끼 벌레까지 달아준다. 영특한 녀석. 아 그러나 다섯 명 모두 물고기는 커녕 입질 조차 없었다. 그래도 호숫가 석양(夕陽)은 아름다웠다. 날이 저물어 반바지를 입은 티나가 추워 했다. 낮에 쓴 타올을 모두 집에 두고 왔다. 네이슨이 웃통을 벗어 티나에게 덮으라고 줬다. 콜튼도 웃통을 벗어줬다. 아 신사 부자 같으니. 네이슨은 아이들에게 작은 영웅이었다. 자상하면서도 때로는 엄격했다.
교환학생인 티나는 며칠 뒤에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미국에 더 머물고 싶어하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 본인이 원한다면 나중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네이슨은 불닭볶음면을 꺼내 들었다. 봉지에 적힌 조리법을 보고 알아서 끓여 먹는다. 두 배 맵다는 핵불닭볶음면이다. 엄청 궁금했나 보다. 아이들도 한 가닥씩 먹어본다. 네이슨은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맵긴 맵네 한다.
물 속에서 실례하기
오늘은 순전히 미국식으로 먹었다. 아침에는 와플과 계란 등. 저녁에는 핫독과 햄버거, 샐러드 등. 떡볶이를 하려고 생각했었는데 어제 내가 카레를 대접한 것에 대한 답례라며 그냥 있으란다. 정통 미국식 음식을 보여주겠다며.
낮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물놀이를 갔다. 어제보다 햇볕이 강해 선블락 스프레이를 몸에 뿌렸다. 네이슨은 어제 스프레이 뿌리는 것을 잊었다가 어깨가 벌겋게 익었다. 네이슨 엄마는 적당히 그을린 내 피부를 보고 부럽다고 했다.
어제 물놀이를 심하게 했는데도 그다지 삭신이 쑤시지 않았다. 다른 운동을 그 정도 강도로 했다면 어딘가 결렸을 것이다. 수영이 근육에 부담이 적은 운동이 확실하다.
튜브에 맥주 올려 놓고 마시다 물놀이 하다 신선놀음을 했다. 오줌이 마려우면 물 속에서 그냥 눴다. 어제는 막판에 정리하고 출발하려는데 신호가 왔다. 육지로 돌아갈 때까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창피를 무릅쓰고 소변이 급하다고 했더니 다윈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에 들어가서 보란다. 원래 그런 것이었어? 철들고 나서 물 속에서 소변 보기는 처음이다. 오늘은 몇 번이고 뜨끈한 소변을 봤다.
다윈은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 평소에 열심히 일한다고 했다. 호수에서 놀다보면 다윈의 보트보다 더 크고 비싼 보트를 타는 가정이 있다. 그것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다지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각자의 분수와 형편에 맞게 즐긴달까. 비교하는 순간 불행은 시작된다.
저녁에는 혼자서 넷플릭스로 영화 Wind River를 봤다. 어른들은 가족간의 편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핸드폰 삼매경(三昧境)이다. 잘 때는 핸드폰 압수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도시나 시골이나 스마트폰에 점령당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황길재의 길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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