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북한)의 종교(기독교) 인식
조선을 세운 김일성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아버지 김형직은 기독교가 널리 퍼지지 않았던 1911년 기독교 계통의 평양 숭실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학교가 바로 숭실중학교이다”라고 말하며, 아버지가 독립운동하다 체포되자 “봉화리의 기독교인들은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명신학교에 모여 새벽기도를 드리였다”고 밝히고 있지요. 외할아버지 강돈욱과 외삼촌 강진석은 장로였고, 어머니 강반석은 집사였는데 어린 김일성을 교회에 데리고 다녔답니다.
김일성은 192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버지의 독립운동 동지들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동지들의 권유로 1926년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군 간부를 키워낼 목적으로 세운 2년제 정치군사학교” 화성의숙에 입학했는데, 숙장(교장)이 천도교 손병희의 제자 최동오였습니다. 김일성이 나중에 종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면서도 “천도교야 하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늘을 믿지 않느냐”며 천도교에 호감을 가졌다는군요. 천도교가 조선에서 정당까지 갖고 제1의 종교가 된 데는 최동오의 영향이 컸겠지요.
그의 아들이 최덕신입니다. 해방 후 만주에서 서울로 들어와 국군 창설에 참여하고,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내다 한국전쟁 중엔 사단장으로 북녘 인민군과 싸웠습니다. 휴전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를 맡았고요. 베트남 대사, 외무부장관, 서독 대사 등을 지내다, 1967년 천도교 최고지도자(교령)가 되었습니다. 1976년 미국에 이민했다가 1986년 평양으로 옮겨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지내다가 1989년 사망했습니다. 1997년 오익제 천도교 교령이 월북한 데 이어, 2019년 최덕신의 아들 최인국이 월북하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이 1927년 육문중학으로 옮겨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1929년 감옥에 갇혔을 때, 옥바라지하며 석방에 힘쓰고 친자식처럼 보살펴준 사람이 손정도 목사였습니다. 정동교회 목사로 유관순의 은사였으며 1920년대 초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사람이죠. 김일성은 그와 기독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신자들 속에는 손정도처럼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훌륭한 애국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도를 드려도 조선을 위한 기도를 드리였고 '하느님'에게 하소연을 하여도 망국의 불행을 덜어달라는 하소연을 하였다.” 그의 큰아들이 남쪽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지냈던 손원일입니다. 둘째 아들 손원태는 길림에서 김일성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는데, 미국에 건너가 의사·교수로 활동하다 1991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의 환대를 받았답니다.
김일성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고,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며 “기독교신자들에게서 인간적으로 도움은 많이 받았다”고 밝히면서도, 중학교 다닐 때부터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이미 독립운동에 발을 들여놓고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보다도 결사전가를 부르는 투사들이 더 필요하였다”며 종교적 신앙심이 공산주의 혁명의식을 고취(鼓吹)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나아가 해방 직후부터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크게 세 가지 이유였을 것입니다. 첫째, 1946년 3월부터 토지개혁을 시행하며 일제와 지주들이 갖고 있던 땅을 공짜로 빼앗아 농민들에게 공짜로 나누어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있었습니다. 이에 김일성은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먹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도 우리에게 불평을 품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지요. 둘째, 1946년 11월 실시된 인민위원회 선거를 앞두고 선거일을 일요일로 잡은 데 대해 기독교인들이 ‘주일선거 반대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무렵 북녘엔 약 2,000개 교회에 30만명 안팎의 기독교신자들이 있었다는데, 이들의 대대적인 반대에 김일성은 기독교인들을 사대주의자나 매국노로 몰아붙이며 기독교를 거세게 비판했습니다. 셋째,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미제국주의 종교’로 치부하던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1949년 “종교는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으면 계급의식이 마비되고 혁명하려는 의욕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종교는 제국주의 문화침투와 식민지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고요. 조선 당국은 1950년대에 모든 교회를 완전히 폐쇄해버리고, 1960년대엔 “지구상에서 미신과 종교가 없어진 유일한 나라”라고 자랑하듯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1972년 평양신학원을 세우고 성직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 <조선 기독교도연맹>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고요. 1983-84년 성경과 찬송가책을 발행하고, 1988년엔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건립했으며 <조선 천주교인협의회>를 결성했습니다. 1989년엔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를 개설하고, 1992년엔 만경대 근처에 김일성이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다녔다는 칠골교회도 다시 지었지요. 2000년대 이후 전국 각 지역에 500-600개의 “허가받은 가정교회”에서 약 13,000명의 신도들이 예배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정교회’ 또는 ‘지하교회’에 대해 한국이나 미국의 전문가들은 종교탄압의 사례로 꼽지만, 저는 반대로 해석합니다. 북녘처럼 폐쇄적이고 통제가 심한 사회에서 ‘가정교회’나 ‘지하교회’가 500-600개나 된다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제한적으로나마 보장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지난날처럼 종교를 탄압하며 종교활동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1-2곳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곳에서 가정예배를 볼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2.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 기독교인의 자세
한국엔 2020년대 현재 탈북자들이 3만명 남짓 있습니다. 최초의 탈북자들은 1945년 8월 북녘에 들어온 소련군에 밀려 내려온 친일파들입니다. 두 번째 탈북자들은 1946년 3월 북녘에서 토지개혁이 시행되자 땅을 빼앗기고 내려온 지주들입니다. 세 번째 탈북자들은 1950년 6월 전쟁이 터지자 내려온 피난민들이고요. 이 중엔 김일성이 말한 대로 “반동적인 장로, 목사”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1세대 탈북자들이 조선에 대한 원한과 적대감으로 남쪽에서 반북감정을 북돋우는 거죠. 요즘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3.1절이나 광복절에 서울시청이나 광화문 광장에서 성조기를 들고 조선 지도자들의 화형식을 갖는 배경일 겁니다.
저는 예수의 가장 큰 가르침이 원수 사랑뿐만 아니라 부정과 불의에 대한 비폭력 저항이라 생각합니다. 원수에게도 적개심을 갖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며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이끌고, 제국의 억압과 착취 및 사회의 부정과 불의에는 체념하거나 순종하지 말고 적극 저항하라는 것이죠. 예수는 특히 ‘기독교인들의 윤리행위의 지침’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 또는 산상수훈을 통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되, 윗사람과 착취자 그리고 지배자들에게 순종하지 말고, 제국의 억압과 착취 및 사회의 부정과 불의에 저항하라고 가르친 게 아닌가요? 물론 적극적으로 저항하되 반드시 비폭력적으로 말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신학자 같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악에 대해 악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는 ‘무저항’을 내세우며 기독교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전쟁을 불법적인 것으로 인식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침략적이든 방어적이든 모든 전쟁을 반대하며, 어떤 상황에서든 악한 자의 생명도 해치거나 빼앗을 수 없다고 했고요. 전쟁을 위한 훈련은 물론 징병에도 “단호하게 그러나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거부하는 게 기독교인의 명예롭고 엄숙한 임무라 여겼지요. 평화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선을 가르치는 종교와 전쟁이 병행하거나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겁니다.
예수의 산상설교와 톨스토이의 주장에 인도의 간디는 벅찬 감동에 휩싸이며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받아 비폭력 저항을 주도했습니다. ‘무저항’이 ‘악에 대해 악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지만, ‘무저항’이란 말 자체가 무슨 일에도 저항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과 불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되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한 것이죠.
제가 직접 보고들은 예수의 원수 사랑 관련 얘기 두 토막 덧붙입니다. 저를 몹시 사랑해주셨고 제가 매우 존경하는 목사·교수와 장로·교수에 관한 사연입니다. 이화여자대학 교수로 세계YMCA 회장 등을 지내다 2022년 돌아가신 서광선 목사의 아버지 목사는 한국전쟁 중 평양에서 북한군에 처형당했습니다. 밧줄에 묶인 채 따발총 자국으로 피투성이 된 시신을 거두며 어린 아들은 “아버지, 이 원수를 갚아 드리겠습니다”라고 맘에 새겼답니다. 그러나 훗날 목사가 되어 예수의 제자로서 북한과의 화해 협력에 앞장섰어요. 원수를 사랑으로 갚은 거죠.
버지니아 노폭주립대학 교수로 미국에서 사회사업 및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2021년 돌아가신 김동수 장로의 아버지 목사는 한국전쟁 중 서울에서 북한군에 체포돼 가슴과 등에 ‘민족반역자’와 ‘딸을 미제에 팔아먹은 목사놈’이란 죄패를 두르고 끌려다니다 처참하게 총살당했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교수가 되고 장로가 된 아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대북 지원에 앞장서며 북한과의 화해 협력과 평화 통일에 힘썼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며 예수를 닮자는 기독교인들이 북한을 주적으로 삼자는 정부 방침에 눈감거나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게 순종의 미덕일까요? 북한을 형제동포로 여기기는 커녕 적으로 간주하며 원한과 적개심을 품는 게 바람직한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냉전 종식 이후 중국을 통해 먹고 살다시피 해왔는데 중국을 봉쇄하며 중국과의 전쟁에 휘말리기 쉬운 한미 군사동맹에 돌진하는 것을 지지하는 게 기독교인들의 도리인지 고민해보시고요. 원수 사랑 및 부정과 불의에 대한 비폭력 저항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 이 글은 2026년 3월 8일 광주 밀알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보완해 정리한 것입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이재봉의 평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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