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을 맞으며
2026년 광복절을 앞두고 해방과 분단 전후에 일어난 일 몇 가지 생각해봅시다.
광복과 해방에 관해
광복(光復)은 빛을 다시 찾는다는 뜻이니 좀 추상적인데, ‘빛’이 주권을 가리키니 광복은 주권 회복이란 의미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1945년 8월 광복 오래전부터 광복이란 말을 썼습니다. 김일성은 1936년 만주에서 ‘조국광복회’라는 항일 무장단체를 만들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거든요.
광복 이후엔 해방이란 말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해방(解放)은 구속이나 억압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니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 강점에서 벗어난 걸 가리킵니다. 광복은 ‘했다’는 능동에 가까운데, 해방은 ‘됐다’는 수동/피동에 가깝죠. 광복과 해방 가운데 어느 말을 쓰는 게 더 바람직할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항복 이유에 관해
광복을 했든 해방이 됐든 일본이 물러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일본은 1945년 8월 왜 항복했을까요? 미국의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 중 어느 게 더 큰 영향을 미쳤을까요? 많은 사람이 원폭 투하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국내외 전문가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왜곡된 반공교육으로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 2개를 떨어뜨리자 소련이 음흉하게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참전했다고 배웠습니다. 큰 잘못입니다. 미국은 1943년 11-12월 테헤란회담에서부터 소련에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해주고, 조선(한반도)을 신탁통치하자고 제안했거든요.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거듭 제안했고요.
소련이 미국 요청을 받아들여 독일이 항복하면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5월 8일 독일의 항복을 받고 3개월 후인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즉각 참전했습니다. 미국이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터뜨리기 전이었지요. 소련이 엉큼한 게 아니라 미국과의 약속을 지킨 겁니다.
미국의 핵무기 2회 사용에 관해
핵무기엔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있는데, 원자폭탄은 플루토늄으로 만들기도 하고 우라늄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우라늄 폭탄을 터뜨리고,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한 다음날 8월 9일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을 터뜨렸으니 두 종류 원폭을 만들어 시험하며 사용한 거죠.
미국의 원폭 투하가 일본 항복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 최초의 미국 핵무기 사용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건 끔찍합니다. 미국 원폭이 일본의 호전적 정치·군사 지도자들을 죽인 게 아니라 민간인들을 죽였거든요. 더구나 히로시마에서 죽은 약 14만명 중엔 우리 조선인들이 약 2만명 포함됐고, 나가사키의 약 7만명 희생자 가운데 조선인들은 약 1만명이었어요. 원폭 희생자의 대략 15% 정도가 조선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소련 참전으로 일본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는데, 핵무기 사용으로 조선인 포함,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죽였으니 조금이라도 칭찬하며 감사할 게 아니라 규탄하며 원망해야겠지요.
전범국 일본이 아닌 피해국 조선의 분단에 관해
유럽에서 전범국 독일이 분단되었듯, 아시아에서는 전범국 일본이 분단됐어야 하는데 오히려 피해국 조선(한반도)이 분단된 이유가 뭘까요? 그리고 왜 광복/해방과 동시에, 더 정확하게는 그에 며칠 앞서, 38선으로 분단됐는가요?
한반도는 미국의 점령정책 때문에 분단됐습니다. ‘전리품(戰利品) 챙기기’라고도 할 수 있겠죠. 예를 들어,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기자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등을 점령해 식민통치하거나 자치령으로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기자 일본을 점령하고, 일본의 식민지 조선도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지속적 요청으로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를 통해 조선에 진격해오니 미국 홀로 조선을 점령할 수 없어 소련과 함께 점령하게 된 거죠. 일본은 미국이 통째로 점령했다가 1952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점령을 끝내, 분단되지 않고 주권을 회복했습니다. 오키나와는 미국이 1972년까지 점령하다 일본에 돌려줬고요.
38선 관련 사연은 서글픕니다. 조선 말 국력이 약해지자, 일본이 1894-95년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긴 직후 1896년 조선을 38선이나 39선으로 나누자고 러시아에 제안했습니다. 러시아가 거부했지요.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 직전 1903년 조선의 39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만들자고 일본에 제안했습니다.
이번엔 일본이 거부하고 1904-05년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이긴 뒤 조선을 통째로 먹으려고 준비했으니 그게 1905년 을사늑약이죠. 1945년 8월 일본이 미국에 항복 의사를 전달하자 미국은 즉시 소련에 38선을 제안한 것이고요. 38선 이남이 이북보다 면적은 적어도 수도 서울과 큰 항구도시 부산과 인천을 포함하고 있으니까요.
신탁통치와 미육군 군정에 관해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하자고 합의했는데, 왜 실시하지 못했을까요? 신탁통치와 관련해서는 조선의 언론 오보와 미군정의 교활하고 악의적인 방치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늦어도 1943년부터 조선을 길게는 40-50년, 짧게는 5-10년 신탁통치하자고 영국과 소련에 제안했습니다. 소련은 조선을 즉시 독립시키거나 꼭 필요하다면 5년만 후견제를 시행하자고 주장했고요. 신탁통치는 강대국들이 조선을 직접 통치하는 것이고, 후견제는 조선사람들이 임시정부를 세우도록 하고 강대국들은 후원하는 것입니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이 조선에 미국식 신탁통치를 실시할지 소련식 후견제를 시행할지 그리고 기간을 어떻게 정할지 협상하다 5년간 신탁통치를 합의했습니다. <동아일보>에 이어 <조선일보>가 정반대로 보도했습니다. 미국은 조선의 즉시 독립을 원했는데 소련의 주장대로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엄청난 오보였지요. 그래서 ‘반탁 (신탁통치 반대), 반소 (소련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는데, 미군정은 그대로 방치했고요. 미국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신탁통치를 조선의 우익이 극력 반대하고 좌익이 찬성하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공동위원회를 만들어 1947년 5월까지 두 번 논의했습니다. 조선인 참가자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 합의하지 못하자 미국이 서둘러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조선 문제를 유엔으로 떠넘기고 말았지요. 그래서 신탁통치는 단 하루도 실시되지 않고, 38선 남쪽에서는 미국 군대가 1948년 8월까지 직접 통치하고, 북쪽에서는 소련 군대가 1948년 9월까지 조선 사람들을 앞세워 간접 통치했습니다.
남쪽에서 조선도 잘 모르고 정치도 잘 모르는 미국 육군이 군사정부를 만들어 3년간 직접 통치하면서 ‘일제시대 행정 경험’이 있는 조선 사람들을 썼습니다. 친일/부일 세력이 척결되기는커녕 중용된 거죠. 분단과 함께 가장 통분할 일 아니겠어요? 광복절을 맞으며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재봉 /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 이 글은 2026년 8월 9일 전주 고백교회에서 얘기한 내용을 보완해 정리한 것입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이재봉의 평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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