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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의 평화세상
1996년부터 원광대에서 주로 미국정치와 평화연구 북한사회와 통일문제 등을 강의해왔고 1999년부터 <남이랑 북이랑 더불어 살기위한 통일운동>을 전개해왔다. 2014년 현재 원광대 사회대학장 및 한중정치외교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쓰거나 번역한 책으로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요한 갈퉁 지음) <두눈으로 보는 북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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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어버이’의 난동과 경찰 출동

한국의 줄초상
글쓴이 : 이재봉 날짜 : 2016-02-03 (수) 04:22:32



LA강연2.jpg


 

125일 저녁 LA 원불교교당. 6.15미국서부위원회가 주관하고 5개 단체가 공동주최하여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강연주제는 한반도 문제해결을 위한 미국의 책임과 의지.” 미국의 책임은 엄청나게 크고 의지는 거의 없다는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인류역사상 최초이자 아직은 마지막으로 핵무기 2개를 사용해 일본과의 전쟁에 승리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했습니다. 19458월 원자폭탄 때문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일찍 해방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으로 죽은 사람 약 23만 명 가운데 무려 4만 명이 무고한 조선인들이었으니 우리가 미국의 핵무기 사용을 고맙게만 생각할 수 있느냐는 취지였지요. 이에 어버이한두 분이 제가 이상하게 말한다고 이의를 제기하시더군요. 질문이나 비판은 강연 후 받겠다고 하는데도 소란을 피우시면서요. 1차 난동이었습니다.

 

해방과 분단 직후 19459월부터 이승만 정부가 세워진 19488월까지 3년간 실시된 미군정의 가장 큰 실책 가운데 하나가 친일파를 제거하기는커녕 그들이 행정을 맡도록 해 아직도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버이세 분이 동시에 일어나 거세게 항의하시더군요. 강연 후 가장 먼저 질문하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달래기도 하고 화가 나면 내 뺨을 때려도 좋으니 강연을 방해하지 마시라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만 소란을 멈추지 않으시더군요. ‘성난 군중이 그들에게 고함도 치고 퇴장시키려고도 하는 가운데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저는 그 어버이들을 강연으로 설득시킬 자신 있다며 오히려 성난 군중과 경찰을 말리는 위선(僞善)과 만용(蠻勇)을 부리기도 했습니다만, 결국 경찰은 어버이들을 모시고 나갔지요. 2차 난동의 결말이었습니다.

 

강연 후 들어보니 경찰을 부른 쪽은 성난 군중이 아니라 어버이들이었다더군요. 언론인 출신 어버이빨갱이들의 집회 및 강연회를 신고했다는 겁니다. 허 참, 자신들이 부른 경찰에게 끌려갔으니 재미있는 세상이지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가스통 할배라고도 불리는 어버이들이 어디어디로부터 몇 만원씩 일당을 받고 이러한 애국운동을 펼치신다니 노인들에 대한 복지가 줄어든 탓일까요?

 

 

LA강연1.jpg

 

아무튼 제 강연의 핵심은 우리가 군사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미국과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중국 사이에서 평화통일과 경제성장이라는 국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는지 고민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냉전 시대엔 미국과 남한의 국가 목표가 반공으로 같았기에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게 바람직했지만, 탈냉전시대엔 미국의 목표가 중국을 견제(牽制)하고 봉쇄(封鎖)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도 한미동맹을 줄기차게 강화하는 게 바람직하냐는 말이지요. 중국은 남한에게 가장 큰 무역 상대국으로 한중 교역규모가 한미 교역의 2배가 넘는 터에 우리가 한미일 공조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데 동참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뜻입니다.

 

강연 직후부터 신은미 선생을 비롯한 6.15미국서부위원회 회원들이 어버이의 난동과 경찰 출동에 관한 글과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 수많은 댓글이 달리고 끊임없이 공유되어 있군요. 그리고 이용오 선생은 강연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유투브에 올려놓았습니다. 난동 때문에 동영상이 세 토막으로 되었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https://www.youtube.com/watch?v=_4Tx6MB-sDs

 

(2) https://www.youtube.com/watch?v=P8nUQA2G9ao

 

(3) https://www.youtube.com/watch?v=QlMqaxsLmXI

 

 

한국의 줄초상

 

125일 강연에 이어 28일과 29일 저녁에도 다른 통일운동단체들이 주관하는 좌담회와 간담회 등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27일 저녁 인천의 자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8일 아침엔 별세했다는 비보를 접했고요. 집안의 막내인 저에겐 아버지 같기도 하고 큰형 같기도 한 분이었기에 슬픔과 충격이 컸습니다. 28일 행사만 마치고 일정을 앞당겨 29일 새벽 LA를 떠났지요.

 

29일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해 전화기를 켜니 그날 새벽 익산의 장기수유영쇠 선생께서 임종(臨終)하셨다는 메시지가 떠올랐습니다. 인천에서의 일정도 단축해 30일 익산에 내려와 장례식장으로 직행했지요. 이 분과 관련해 2년 전 다음과 같은 글을 여러분께 이메일로 보냈더니 한겨레에서 보도하기도 하고 많은 분들이 유영쇠 선생을 돕기 위한 성금을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합니다.

 

<내가 본 유영쇠 선생>

 

2001년인가 2002년이었다.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하던 법대학생이 수업 후 면담을 신청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장기수 어르신을 알게 됐는데 그 분께서 내 강의를 한 번 듣고 싶어 하신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병실 옆 침대에 누워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빨치산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듣고 있던 북한 관련 수업에 관해 소개했더니 호기심을 표하시더란다.....

 

그 다음 주 수업에 비쩍 마른 70대 노인이 맨 앞에 앉아 내 말 한 마디 놓칠세라 열심히 필기해가며 청강했다. 강의가 끝나자 그가 직접 물었다. 계속 들어도 되냐고. 한 달 쯤 지나 종강하게 되자, 학기 중간 이후부터 수강했으니 다음 학기 첫 수업부터 출석하고 싶다고 했다. 새 학기 개강부터 종강까지 16주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지각, 조퇴, 결석하지 않고 맨 앞자리를 지켰다. 서울에서 모임이 열려 동지들을 오랜만에 만나도 다음날 수업이 있으면 심야버스나 기차를 타고 꼭 익산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아침 9시 시작하는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유영쇠 선생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연을 들어보니 1950년대 초 고향인 김제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1954년 붙잡혀 1983년까지 29년간 감옥생활을 했단다. 그리고 출옥 후 갈 데가 없어 부랑인 수용시설인 이리자선원에 몸을 맡기고 있다니 기막히게 기구한 신세였다. 그러나 매사에 적극적이고 낙천적이었다. 내가 외부에서 강연하거나 무슨 모임을 가져도 꼭 참석하고 싶어 했다. ‘남이랑북이랑 더불어 살기위한 통일운동에도 기꺼이 동참했다. 한 달 생활비가 5만원이라 택시는커녕, 버스도 맘껏 타지 못한 채 고물 자전거에 올라 여기저기 강연이나 모임에 참석하며 회비도 꼬박꼬박 냈던 것이다. 가진 게 적어 많이 내지 못한다고 안타깝고 미안해하면서.

 

이러한 과정에서 날 꽤 신뢰하게 된 모양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05년 무렵 장기수들을 북녘으로 송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은밀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남쪽에 남아 있어야 할지 북쪽으로 가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향인 남쪽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더 가까울 북쪽에도 피붙이는 없다고 했다.

 

선생님, 여기서는 빨갱이라는 낙인(烙印)이 찍히고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오셨는데, 북녘으로 가시면 우선 몸이 편하시겠죠. 당국에서 집도 마련해주고 원하면 결혼도 주선해준다니까요. 그러나 맘은 편치 않으실 것 같습니다. 기아와 궁핍에 허덕이는 인민들을 많이 보시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젊었을 때 목숨 내걸고 싸우며 추구했고, 감옥에서도 수십 년 동안 전향을 거부하며 추구해 오신 사회주의의 이상을 북녘 체제에서 찾지 못한다면 좌절감이나 배반감까지 맛보시지 않겠어요?”

 

교수님, 나는 내 육신이나 마음이 편하고 편하지 않고는 전혀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쪽에 있어야 통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에요.”

 

그렇다면 여기 계십시오. 북녘 인민들이야 모두 통일을 바라지 않겠어요? 원치 않는다고 해도 지도자가 통일방침을 정하면 그대로 따를 테고요. 그러나 여기 남쪽에서는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절반이잖아요.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통일을 원하도록 이끄셔야죠. 거기서는 통일운동하실 필요가 없겠지만, 여기서는 통일운동의 필요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선생이 더욱 존경스러워졌다. 남쪽을 택할지 북쪽을 택할지 갈림길에서, 난 맨 먼저 몸과 맘의 안락함을 떠올렸지만, 70 평생을 총각으로 살아온 노 혁명가는 육신의 고통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평화와 통일에 몸 바칠 생각만 하고 있지 않은가.....

 

20143월 말 아침 선생이 전화를 해왔는데 받으니 말이 없었다. 두어 번 반복됐다. 오후엔 내가 몇 차례 전화했지만 선생이 받지 않았다. 다음날 통화가 이루어졌는데 00요양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겨우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였다. 4월 초 아내와 찾아간 요양병원에서 먼저 간호사를 만나 선생의 병세를 물어보니, 20139월 입원했는데 치매와 전립선암 등 무려 14가지 병을 지니고 있단다. 병상에 누워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도 못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선생과 말과 글을 섞어 겨우 대화를 나눴다..... 4월 중순, 지금까지 선생을 보살펴온 평화운동가들과 협의해 요양병원과 요양원이 어우러져 있는 원광효도마을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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