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간 꿈꾸던 것을 완성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感悔(감회)가 생기네요.”
지난달 24일 뉴욕 롱아일랜드시티 ‘갤러리 MO’. 중견화가 조성모 화백(51)의 최근작 ‘자연과 문명의 대화’ 오프닝 리셉션이 펼쳐졌다. 갤러리 벽에는 그림들이 걸려 있고 중앙에는 거대한 직사각형 형태의 조형물이 서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높이가 족히 4m는 되보이는 이 조형물에 집중했다. 중견서양화가가 무슨 일을 한 것일까. 놀랍게도 이것은 컴퓨터의 CPU와 VGA 카드, 메모리 등 컴퓨터와 TV, 라디오의 부품들로 이뤄진 것이었다.
조성모 화백은 “데스크탑 컴퓨터와 랩탑, 노트북과 TV, 라디오 등 40대의 부품이 활용됐다”고 말했다. 마치 LED램프처럼 환하게 빛을 발하는 이 작품이 더욱 놀라운 것은 컴퓨터 기판과 디스크 일부가 정상 작동되고 TV모니터에서 동영상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라디오의 볼륨도 어디선가 흘러나오지만 라디오처럼 생긴 것은 보이지 않았다. 부품이 해체되어 작품을 위한 재조립과정에서 원래의 形體(형체)를 잃었기 때문이다.
조 화백이 이 작품을 구상한 것은 미국 유학 직전인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먼저 캔버스에 드로잉 이미지를 구현했다. ‘문명의 신호(The Signal of Civilization)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언젠가 만들 생각으로 세라믹으로 기초석을 만들었어요. 그후 18년만에 창고에 넣어 두었던 것을 꺼내왔는데 그 세라믹에 95년도와 싸인이 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뿐만이 아니다. 10여년전부터 낡은 컴퓨터와 노트북 등을 눈에 띄는대로 모으기 시작했다. 때가 되면 작업을 하려했기 때문이다. 그가 마침내 20년간 꿈꿔온 일을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은 지난해 여름 롱아일랜드 시티의 한 건물에 새로운 공간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천정의 높이가 유난히 높은 이곳에 입주하면서 그는 자신이 추구한 ‘자연과 문명의 대화’ 완결판을 짓기로 마음 먹었다.
지난해 10월부터 꼬박 5개월을 매달렸다. 컴퓨터 부품을 분해해 1인치 두께의 아크릴판에 정교하게 붙여나갔다. 부품들은 오래된 순으로 붙여올라가 노트북 등 최근의 제품들은 상단을 형성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래된 부품일수록 투명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부에 8피트 크기의 형광등을 연결해 빛을 발하는 이 조형물의 한쪽 면은 빨간색으로 LOVE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가 빌딩의 이미지를 선택한 것은 빌딩이야말로 문명의 모든 것을 含蓄(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명의 복잡하고 정밀한 부분들은 내장된 채 심플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외관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는 역설적으로 부품들을 조형물의 몸체로 두름으로써 문명의 숨김없는 속살을 드러낸 것이다.
갤러리에서 만난 뉴욕 맨하셋미술협회의 바바라 실버트(Barbara Silbert) 회장은 “한마디로 환상적(fantastic)이다. 컴퓨터만 11대의 부품들이 들어간 조성모 작가의 신선한 작품에 압도됐다”고 찬사를 보냈다.
실버트 회장은 “각각의 면에서 다른 빛이 발산되고 정교하게 붙여진 컴퓨터 부품들이 살아 움직이며 하나의 스토리를 말해준다”면서 “하단의 세라믹 코너스톤위에 세워진 컴퓨터 부품의 빌딩은 석기시대의 인간이 문명의 탑을 향해 기어올라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풀이했다.
1&9갤러리 한혜진 관장은 “조성모 화백은 ‘길’의 연작을 통해서 자연과 문명의 대화를 그리는 ‘길’의 작가다. 첨단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의 회로는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수많은 길을 시사한다. 작가는 가장 원초적인 자연의 길인 사랑을 그 밑면에 포장해 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일반 미술애호가들도 “조성모 작가가 상징주의와 컬러, 디자인 그리고 빛이 어우러진 역동적인 결실을 낳았다”며 上讚(상찬) 일색이다. 김해숙 씨는 “조 화백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작가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작품을 만들 것이라는건 상상하지 못했다”며 놀라워했다.
이 작품과 함께 전시되는 열일곱개의 그림과 版畵(판화)는 대부분 첫 선을 보이는 작품들이다. 그중에는 70년대와 80년대 90년대 그림들이 있는데 이 조형물이 나오게 된 동기를 말해주고 있다. 수십년만에 덩달아 빛을 보는 셈이다. 이와 함께 조형물을 촬영해 판화로 프린트한 작품도 눈길을 끈다.
1985년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최한 청년작가전에서 베니어판 4개를 붙인 큰 화면의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이번 작품과정에서 비슷한 구성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부와 권력, 명예를 상징하는 문명의 심볼을 큰 빌딩으로 이미지화한 ‘虛像(허상)’ 시리즈도 <에꼴드 서울> 그룹전에서 화제를 모았다. 인간의 욕심과 사악함이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 이 작품은 2001년 9.11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면서 소름돋는 현실이 됐다.
그러나 정작 그는 미국에 온 후 자연과 문명이 照應(조응)하고 對話(대화)하는 길을 모색해 왔다. 극과 극의 상반된듯한 이미지가 함께 어우러지는 작업의 절정이 이번 작품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는 전시회 오픈에 맞춰 멋진 동영상을 유투브에 올려놓았다.
http://www.youtube.com/watch?v=kSkIutW5OaM
“동료 사진작가와 영화감독의 도움으로 기록으로 찍어 놓은 것을 편집해 올렸어요. 제 작품의 메인 컨셉이 ‘자연과 문명의 대화’ 였는데 이번 작품으로 그 컨셉을 총정리했으니 20년 쳇증이 싹 씻겨 내려간 것 같습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roh.com
<꼬리뉴스>
5월과 6월 부산과 서울에서 ‘조성모 초대전’
“제가 거의 20여년을 구상했는데 시간과 특히 공간, 그리고 재료모음에 문제가 있어 여태것 미뤄 왔어요. 언젠간 만들어야지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20여년을 보내고, 혹시라도 제 작품의 주된 주제인 ‘자연과 문명의 대화’에 대한 컨셉으로 누군가 만들면 어쩌나 勞心焦思(노심초사)하며 20여년을 견뎌왔어요. 그런데 지난 여름 천정높은 작업실을 갖게 되니까 ‘이 작품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치더라구요. 제일 처음 한 일이 이 작품을 올릴 수 있는 네모나무판에 바퀴다는 거였습니다. 허허..”
조성모 화백은 리셉션 내내 상기된 표정이었다. 오랫동안 꿈꾸는 일을 했다는 만족감과 안도감이 풍겼다. 그러나 작품의 완성은 終着驛(종착역)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 또다른 20년을 향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그는 올해 한국에서 두차례의 전시회를 예정하고 있다. 부산의 K 갤러리에서 5월 23일에서 6월 10일까지, 그리고 인사동 선 갤러리에서 6월 15일부터 30일까지 초대전이 열린다.
안타깝게도 이 조형물은 워낙 덩치가 큰데다 운반시 최상의 주의가 필요해 한국에 싣고 가지는 못한다. 조 화백은 “아쉽긴 하지만 동영상과 이미지 등으로 대신할 생각입니다. 그림과 판화 등 관련 작품들도 많으니 모국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을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