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알 수 없는 통영의 한 우체국에서 날아온 일련의 한국문학 자료들이 있다. 1945년 해방무렵부터 1967년 시인 유치환이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단의 러브스토리로 알려진 일찍이 홀몸이 된 여류시인에게 거의 매일 보낸 수천통의 편지들이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합병한지 100년이 지난 오늘 이 우체국은 역사의 논란속에 지금도 건재하다. 뉴욕타임스가 "청마 유치환을 놓고 40년 가까운 일본의 식민통치시대에 지식인의 책임감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고 4월 5일 보도했다.
논란이 시작된 것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단의 통영 사람들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중 하나인 유치환을 기리기 위해 우체국 이름을 그의 호를 따서 청마 우체국으로 바꿔달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또다른 사람들은 유치환을 친일파로 칭하며 분노했다.
시인이자 우체국 이름변경 시도를 반대하는 그룹의 리더인 최정규(58)씨는 “위기의 시대에 조국을 일본에 팔아넘긴 자를 기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기념하는 해는 한국인들이 식민시대의 경험을 생각하는 바와 논란의 화두가 되는 양심의 반성이 되고 있다.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퇴한지 65년의 세월이 지난 가운데 대부분의 친일인사들이 사망했음에도 다시 한번 그 시기를 돌아보게 하고 있다.
한세기가 넘게 지속된 친일행위는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왕을 경배하며 참전한 행위들을 일컫는다.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일본문화의 유입을 막고 일본 노래가 한국의 매체를 통해 나오지 못하게 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에서 ‘친일파(Chinilpa)’라는 딱지는 당사자는 물론, 그의 자손들까지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다. 이같은 논란은 한국의 근대사에서 지난해 11월 친일파에 관한 연구를 한 정부와 민간기구가 보고서를 발표했을 때 부각됐다.
친일조사대통령위원회는 1005명의 매국노를 발표한 반면 민간기구는 이보다 훨씬 많은 4389명을 발표했다. 어떤 기구도 이들을 기소할 수는 없었지만 친일파재산조사위원회라는 독립된 정부기구는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반역자 114명의 재산인 8800만 달러 상당의 부동산을 몰수하는 최근 수년간 추진해 왔다.
친일파에 관한 책을 저술한 전직 기자 정운현 씨는 “이러한 작업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친일행위는 우리 사회의 짓무른 상처지만 얼마전까지도 어느 누구도 손대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 됐다”고 비판했다.
두 개의 친일 명단은 악명높은 반역자로 증오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2차대전후 유명한 시인과 소설가, 작곡가, 가수, 전직대학총장, 언론사주, 헌법을 기초한 학자와 총리, 장성 등을 포함하고 있다.
민간기구의 명단에는 보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존경을 받는 전 대통령 박정희도 있다. 그는 일본 육사에서 장교로 복무했고 한국의 국가를 작곡한 안익대 역시 들어 있다.
두 개의 명단이 발표된 후 일부 도시들은 친일인사로 발표된 이름으로 명명된 음악회들을 취소하고 기념물들도 철거됐다. 또한 이들의 자손들은 재산을 몰수당할까 두려워 성씨를 바꾸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통영에서는 유치환에 대한 논쟁속에 명예훼손 소송이 유족들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우체국 이름 변경캠페인의 선두에 선 공무원 김순철 씨는 “그들은 마녀사냥을 하고 우리 역사에 침을 뱉고 있다. 부관참시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과거 역사에 얽매인 것은 우리가 아직 일본으로부터 독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친일파들을 좀더 좁게 잡은 정부 기구의 경우 유치환이 명단에 빠져 있다. 민간기구는 유치환과 380명의 친일명단에 대해 추가적인 조사가 이뤄질 때까지 결론을 유보한 상태다. 그러나 유치환의 친일행위는 이미 그를 기념하는 대중의 노력에 상처를 입혔다.
역사가들은 이같은 논란이 한국이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분출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군장성과 고위공무원 등 일제시대 부역한 친일파들을 청산하고 단죄하는 최초의 노력은 이들을 이용해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이뤄지지 못했다.
이들 친일파들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자신들을 반공주의자이자 친미엘리트로 포장했고 그들의 자손들은 박정희를 포함한 보수적인 대통령들의 연임속에 다양한 분야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누렸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집권 한나라당의 강력한 지도자이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노무현은 취임직후 “한국의 근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한 시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친일 부역자들을 조사하고 왜정시대 얻은 재산을 몰수하는 기구를 조직하는 법안을 지원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정치적으로 의도된 저급한 행위로 매도하며 반격을 가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남쪽 바다에 위치한 통영만큼 적절한 논쟁의 장이 되기에 적합한 도시는 없다.
유치환의 명성은 사망이후 그가 일제시대 독립군 투쟁을 비판하고 학생들을 2차대전 일본군에 의용군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글과 시가 발견되면서 훼손됐다.
유치환에 헌정된 향토박물관의 관장인 신권호 씨는 “그들은 몇편의 시와 몇 개의 구절들로 시인의 전체 경력을 친일행위로 몰아붙이고 있다. 그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항변했다.
1959년 발표된 수필의 모음에서 유치환은 식민시대 질식할 것같은 지식인이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오직 두 개의 선택만이 있었다. 적에 대항해 온 몸을 던지는 애국적 저항과 생존을 위해 굴욕을 감수하는 것이다. 비겁하게도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고 썼다.
통영에 사는 김판열 씨(64)는 유치환과 박정희를 친일파에 포함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일제에 협조하는 것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들은 일본인으로부터 가능한 배워 훗날 나라를 건국하는데 일조했다”고 옹호했다.
그러나 역시 통영 시민인 공남훈 씨(33)는 과거를 자극하는 것이 두렵다고 정의로운 길을 단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비록 그것이 고통스럽다해도 우리는 조국에 반한 행위를 한 사람들을 정직하게 기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또다시 침략을 당했을 때 전쟁터로 나갈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원은미기자 ewon@newsroh.com
<꼬리뉴스>
21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남편을 보내고 청상과부된 정운 이영도 시인을 청마가 처음 본 것은 해방후 통영여중에서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게 됐을 때였다. 당시 청마는 38세의 유부남이었고 정운은 29세의 가사과목 교사였다.
항상 단아한 한복 차림을 한 정운에게 마음을 빼앗긴 청마는 이후 20년에 걸쳐 5천통의 연서를 보냈다. 부산으로 직장을 옮긴 청마가 통근무렵 시내버스에 치여 불귀의 객이 된 이후 정운은 그간 받은 연서 중 200편을 간추려 애절한 서간시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발간한다.
청마와 시조시인이었던 정운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두편의 시.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리움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바라기도 하리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보다가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