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땀과 진심에서 시작된다” <와이드 인터뷰>
Newsroh=로창현 대표기자 newsroh@gmail.com

초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던 뉴욕 롱아일랜드 맨하셋(Manhasset)의 명품몰, 이탈리안식당의 야외 테이블에는 은은한 카푸치노 향과 함께 가을의 풍요로움이 감돌았다. 2시간 넘게 이어진 심층 인터뷰를 통해 한 여성이 걸어온 눈부신 삶의 궤적(軌跡)과 그 깊은 속내를 마주할 수 있었다.
김민선 뉴욕 리즈마재단 회장은 '특급 민간외교관'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유엔회원국을 능가하는 220여 다민족이 모여 사는 뉴욕이라는 치열한 용광로 속에서, 그는 언제나 한국인의 자긍심을 세우는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결실 뒤에는 밤을 지새우게 했던 시련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올해 미 연방의사당에서 열린 한국문화의 달 행사에서 연설하는 김민선회장
위기가 다가올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특유의 긍정적 사고와 강인한 멘탈, 그리고 모국과 한인사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아직 세워지지도 않은 박물관에 뉴욕주 정부가 500만 달러라는 전무후무한 거액의 예산을 배정한 기적부터, 일본의 전방위적인 로비 공세를 뚫고 미 연방의회의사당에 사상 처음 위안부 소녀상을 전시하기까지, 그가 써 내려간 역사적 순간들은 모두 과감한 결단과 헌신의 산물이었다.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감회어린 표정을 짓던 김민선 회장의 모습은, 40년 가까이 취재 현장을 누벼온 필자의 가슴에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김민선 회장의 뜨거웠던 삶과 도전의 기록을 여기에 담아낸다.
故 김운용 IOC 부위원장의 가르침
- 회장님의 삶을 들여다보면 미주 한인사회의 격동기 한가운데서 수많은 파도와 시련을 넘어서 성취한 세월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위기에도 늘 흔들림 없이 당당한 모습인데, 마음을 다잡게 해준 특별한 비결이 있었나요?

“제게는 늘 마음속 깊이 새기는 거대한 버팀목이자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시아버님이신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거목 故 김운용 IOC 부위원장님이십니다. 아버님은 국제 스포츠 외교의 최전선에서 온갖 비바람을 맞으실 때마다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선아, 사람이 큰 일을 하다 보면 억울한 일도 당하고 시기 질투와 오해도 받기 마련이다. 남들이 어떻게 모함하고 비난하든, 진실되고 떳떳하다면 눈 하나 꼼짝하지 마라. 당당하게 너의 길을 걸어가라’ 고요.

치열한 이민 사회 활동을 하며 억울한 오해를 받거나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시련이 밀려올 때마다 아버님의 호통 같은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그 단단한 가르침 덕분에 어떤 왜곡이나 공세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히 정면 돌파할 수 있는 강인한 멘탈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인이 없던 동네에 한국의 씨앗을 심다
- 시어른의 웅숭깊은 가르침이 회장님의 강인한 자산이 되었군요. 최근까지 아주 바쁜 일정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요즘은 리즈마(LISMA) 국제 음악 콩쿠르 심사 및 카네기홀 연주회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젊은 음악 인재들을 발굴하고 무대에 세우는 작업이 참 보람찹니다.”

(이화여대 음대를 졸업하고 1983년 미국에 이주한 김민선 회장은 비영리법인 리즈마 재단을 설립하고 리즈마 국제음악경연대회를 통해 카네기홀 데뷔 및 장학금 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 음악뿐만 아니라 회장님은 미국 한인사회의 교육과 문화 민간외교 분야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해오셨지요. 특히 초기 이주 당시 한인들이 거의 없는 곳에서 겪은 일화(逸話)가 인상적입니다.
“처음 롱아일랜드에 정착했을 때는 지역 학교에 한인 학생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겉돌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한국 문화 알리기였지요. 매년 학교 교사들과 스태프들을 위해 직접 한국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 대접하고, 정기적인 후원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에 대한 지역 사회의 인식이 바뀌더군요. 내친김에 뜻을 모아 롱아일랜드 최초의 한인학부모협회를 창설했습니다. 학부모들이 목소리를 내고 아이들이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판을 짠 것이죠.
감사하게도 저희 아이들도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잘 자라주었습니다. 큰아이는 주지사 상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둘째 아이 역시 지역 사회와 학교에서 인정받는 인재로 성장해 주어 엄마로서 더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길거리 악사를 카네기홀 스타로 발굴
- 회장님의 삶을 들여다보면 문화예술을 통해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영화 같은 일들도 참 많습니다. 길거리에서 발굴한 러시아 음악가 이야기도 아주 감동적이었어요.

니콜라이 스티우카 <롱아일랜드 컨서버토리오브뮤직 홈페이지>
“아코디언 연주자 니콜라이 스티우카(Nicolae Stiuca) 말씀이군요. 3년 전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앞 길거리에서 기가 막힌 아코디언 소리를 들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음악 박사 학위까지 받은 뛰어난 인재였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송금이 막히고 고국으로 돌아가면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갈 처지에 놓여 길거리 악사로 연명하고 있었지요.
제가 명함을 주며 저희 뉴욕 리즈마 음악 콩쿠르에 응모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콩쿠르에는 아코디언 부문이 없었지만, 심사위원 9명이 연주 영상을 보고 탄복해 특별히 '스페셜 카테고리'를 신설해 우승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뉴욕 카네기홀 데뷔 무대까지 세워주었지요.”


- 한 예술가의 생명과 꿈을 동시에 구해주신 셈입니다. 그 이후 어떻게 되었나요?
“카네기홀 연주라는 엄청난 경력을 바탕으로 미국 취업비자(H-1B)를 받게 되었고, 지금은 저희 재단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석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 막연한 꿈이었던 카네기홀 연주가 현실이 되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며 눈물로 보낸 그의 편지를 받았을 때, 저희 이사진 모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1억5천만달러의 가치 한인회관을 지켜낸 주역
- 회장님은 34대와 35대 뉴욕한인회장(2015~2019)을 맡아 봉사하셨는데, 사실 한인회장이 되신 결정적 계기가 한인회관을 사수한 사건이었지요. 그때 참 대단했습니다.
“제가 한인회장 직전에 뉴욕한인회 이사장을 맡았어요. 그런데 우리 이민 선배들과 뉴욕 한인들이 피땀 흘려가며 정성으로 마련한 맨해튼 26가 뉴욕한인회관이 자칫 타인의 손에 넘어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우리 한인사회의 상징이자 자산인 회관을 빼앗길 수 없다는 각오로 온 몸을 던져 소송 투쟁을 벌였고, 결국 한인회관을 온전히 지켜냈습니다. 그렇게 회관을 사수해낸 책임감을 갖고 지금까지 봉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회관을 지키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역사는 쓰이지 못했을 겁니다.”


맨해튼 24가에 위치한 뉴욕한인회관
- 덕분에 현재 맨해튼 중심가의 뉴욕한인회관은 그 가치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최근 재개발 이슈와 함께 뉴욕 부동산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죠?
“뉴욕시의 '시티 오브 예스(City of Yes)' 조닝(용도지역) 규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기존 6층 규모의 한인회관 부지에 최대 30층 안팎의 고층 건물 신축이 가능해졌습니다. 2008년만 해도 엑셀(Extell) 등 대형 개발사들이 공중권(Air Rights) 매입을 타진할 때는 500만 달러 선이었지만, 지금은 부지 전체 가치가 재건축 시 최대 1억 5,000만 달러(한화 약 2,100억 원) 이상의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현재 여러 개발업체들의 문의가 쏟아지고 있는데, 감사하게도 제가 한인회 차원의 재개발 추진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뉴욕 한인들의 피와 땀이 서린 이 보물 같은 자산을 미래 후손들에게 최고의 가치로 물려줄 수 있도록 차근차근 큰 그림을 그려나갈 생각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스승 사애리시 선교사
- 회장님이 7년간 뜻깊게 펼쳐오셨던 '유관순 상' 사업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위원회의 명칭과 사업 방향이 새로워졌다지요?
“네, 저희가 그동안 유관순 열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더불어 그 뒤에 계셨던 미국인 스승 사애리시(Alice H. Sharp) 선교사님의 노고를 조명하는 일에 공을 들여왔습니다. 사애리시 선교사가 충남 공주에서 유관순 열사를 처음 만났을 때 알파벳과 간단한 영어 문장을 가르쳐 주셨는데 다음 날 유관순 열사가 그걸 완벽하게 전부 읽고 외워 오는 모습에 그 천재성과 영민함에 깊은 감동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시골에 묻히기엔 너무나 아까운 인재라 판단한 사애리시 선교사는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을 찾아가 "이 아이는 더 큰 학문을 배워 나라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며 간곡히 설득하셨고, 결국 자신의 수양딸로 삼아 이화학당으로 유학을 보내 배움의 길을 열어주셨지요. 훌륭한 스승이 계셨기에 위대한 독립운동가도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최근 한국의 유족분들께서 유관순 열사 관련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자 하는 뜻을 밝혀오셨습니다. 유족분들이 직접 사업을 이끌어 가신다면 뜻깊은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하구요. 이 사업을 앞으로 더욱 잘 발전시켜 나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저희 이사회는 자연스럽게 단체명을 ‘한국역사홍보본부’로 전환했습니다. 유관순 열사와 사애리시 선교사님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계기로 안중근, 이순신, 장보고, 윤봉길 선생 등 자랑스러운 역사 속 인물들을 매년 새로이 선정하여 미국 사회에 널리 소개하고 칭송하는 사업으로 확장하기로 했습니다.”

한인이민사박물관(MOKAH) 설립의 기적
- 회장님은 한인회장 재임 시절, 회관 내에 처음 미주한인이민사박물관(MOKAH)을 설립하고 퇴임 후에도 관장을 맡아 이끌어 오셨습니다. 특히 뉴욕주정부로부터 박물관 건립 예산으로 무려 500만 달러(한화 약 65억 원 이상)를 지원받은 것은 미주 동포 사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테이블 위로 떨어진 나뭇잎 그림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김 회장은 아이스 티 한 모금을 머금고는, 가장 가슴 뛰었던 순간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이 청초한 소녀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인회관을 지켜낸 후 우리 선조들의 눈물겨운 이민 역사를 기록할 공간이 꼭 필요하다고 느껴 박물관을 설립했습니다. 이후 박물관의 미래와 한인 2, 3세 교육을 위해 개인적으로 플러싱에 부지를 마련해 이민사박물관에 기증 했지요.
주정부 500만 달러 예산 확보는 각고의 노력과 열정이 어우러진 여정이었습니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 시절이라 뉴욕주 재정이 세수(稅收)가 30%나 깎여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기존 프로그램들도 예산이 삭감되던 때에, 세우지도 않은 박물관에 50만 달러도 아니고 500만 달러를 달라고 하니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때 뉴욕주 의회의장을 찾아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의장님, 우리 한인 이민 역사가 120년이 넘었습니다. 다른 유대계나 중국계는 이미 오래전에 박물관을 짓고 매년 주정부 지원을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너무 순진해서 12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이제야 박물관을 지으려 합니다. 만약 500만 달러가 많다고 생각하신다면, 지난 120년 동안 우리 한인 이민자들이 이 땅에 흘린 땀과 기여의 가치가 얼마인지 의장님이 직접 금액으로 정해주십시오. 그 액수가 우리 한인들의 가치라고 한인사회에 전하겠습니다.’”

- 정곡을 찌른 공 넘기기였군요! 당시 한인 2세 정치인 론 김(Ron Kim) 하원의원이 끈질기게 협상했던 공조도 결정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론 김 뉴욕주 하원의원과 손잡고 뉴욕주정부를 상대로 벌인 끈질긴 협상은 그야말로 밤샘 전투였습니다. 론 김 의원이 주 의회 내부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동료 의원들을 설득하고 압박하며 필사적으로 뛰어주었습니다. 결국 500만 달러 예산안이 최종 통과되었다는 전화를 론 김 의원에게 받은 날, 너무 감격해서 일주일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120년 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들부터 시작된 선조들의 눈물과 독립을 위해 한푼 두푼 모은 헌신이 떠올랐고 그분들의 역사가 미국 역사의 일부로 인정받은 순간이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한복을 입은 김민선회장이 론 김 의원과 함께 뜻깊은 순간을 함께 했다
1902년의 선조를 만난다면, 그리고 100년 후 타임캡슐
- 말씀을 듣노라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만약 회장님께서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을 떠나 이듬해 1월 13일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이민 선조들을 지금 직접 만난다면 어떤 말을 건네고 싶으신가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눈가가 젖는 듯 했다.) 그분들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들께서 흘린 눈물과 땀방울, 그 모진 고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께서 이 땅에 뿌린 작은 씨앗이 100년이 지나 이렇게 우람한 나무로 자라났고, 그 후손들이 당당히 미국 사회의 주역으로 서서 당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박물관을 세웠습니다. 부디 안심하시고 자부심을 가지십시요.”

- 상상만 해도 감동적입니다. 내년에 이민사박물관 개관식(開館式)을 할 때 AI 영상 기술로 그 당시 선조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 회장님과 대화 나누는 장면을 소개하면 더욱 극적이지 않을까요?
“아! 정말 멋지고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AI 기술로 선조들과 후손이 시공간을 초월해 대화할 수 있다면, 박물관을 찾는 이들에게 이민 잔혹사와 영광의 역사를 전달하는 최고의 감동 콘텐츠가 될 것 같습니다. 꼭 추진해보고 싶네요.”
- 이처럼 뜻깊은 한인이민사박물관이 100년 후의 후손들을 위해 묻어둘 타임캡슐에는 어떤 메시지와 기록들을 넣고 싶으신가요?
“우리 민족은 120년 전 이역만리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땅에 한인의 뿌리를 내렸고, 이민사 박물관은 그 정체성을 오롯이 지켜낸 소중한 상징의 공간입니다. 100년 후의 후손들에게 ‘너희들도 한인이라는 자부심을 절대 잊지 말라’는 메시지와 함께, 이민사 박물관 예산이 확정되던 날 론 김 의원과 껴안고 눈물 흘리며 기뻐했던 당시의 언론 보도물, 그리고 오늘 진행한 뉴스로(NEWSROH)와의 뜻깊은 심층 인터뷰 기사를 타임캡슐에 함께 넣고 싶습니다.”

연방의사당 소녀상 전시 막전막후 스토리
- 미 연방의회의사당에 위안부 소녀상을 세웠던 비화(祕話)도 빠질 수 없습니다. 당시 일본 측의 방해가 극심했지요?
“일본 총영사관과 로비스트들이 엄청난 자금을 쓰며 압박을 가했고 행사가 세 번이나 전격 취소되었지요. 박스에 소녀상을 몰래 싸서 새벽 3시에 007 작전으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취소 통보를 받았을 때 워싱턴 D.C.로 날아가 낸시 펠로시 의장과 의원들 앞에서 책상을 쾅 치면서 외쳤습니다.
"미국이 일본의 로비에 손을 빌며 진실을 외면합니까? 세계 민주주의의 중심이라는 연방의회가 역사의 진실을 덮는다면, 저는 미국 시민권자로서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쏟아내고 뉴욕에 돌아왔는데 그날 밤 펠로시 의장이 직접 전화가 왔습니다 저의 진심어린 분노에 마음이 움직인 펠로시 의장이 전시회를 전격 승인했고, 연방 경찰의 호위 속에 미 연방의회 역사상 최초로 위안부 소녀상 전시회가 성사되었습니다.”

낸시 펠로시 의장과 함께

- 문화와 외교를 아우르는 회장님의 역량이 인정받아, 최근에는 백악관 역사보존위원회 자문위원으로도 발탁되셨습니다.
“감사하게도 백악관 역사보존위원회에 유색인 및 아시아계 최초로 자문위원에 위촉되었습니다. 백악관은 대통령 개인 소유가 아닌 연방 정부의 역사적 유산이며,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백악관 건물을 개조하려 할 때 위원회가 연방법원에 공사 중단 소송을 걸어 승소했을 만큼 막강한 권한을 지닌 곳입니다. 미국 개국 250주년을 앞두고 최고위층에서 유색인을 대표해 목소리를 내고, 우리 동포 사회의 위상을 높일 수 있게 되어 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 열정으로 새로운 길을 열다

가을 햇살은 테이블 위에 시나브로 깊고 붉은 음영을 드리운다.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김민선 회장이 털어놓은 이야기 속에는, 한인이 없던 동네에서 한국 음식을 나르던 학부모의 따뜻한 마음부터 미 연방의회와 주정부를 흔든 거침없는 도전 정신까지 40여년의 세월이 담겨 있었다.
위기를 불평하기보다 자신과 열정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긍정의 에너지는, 척박한 이민 사회를 일구어온 미주 한인들의 삶 그 자체이자 그이만의 가장 큰 무기였다.
“남들이 실패라고 말할 때, 저는 한 번도 뺏겼다거나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고, 나는 또 다른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을 찾아 나아가면 되니까요.”
미소를 짓는 김민선 회장의 당찬 한마디 속에 뜨거운 모국 사랑과 민족의 자긍심(自矜心)이 느껴졌다. 뉴욕 땅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는 김민선 회장. 그이가 앞으로 또 어떤 기적 같은 역사적 장면들을 써 내려갈지 기대가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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