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장의균-강명구-민승준 대표
Newsroh=로창현기자 newsroh@gmail.com

지난 15일 민통선내 개성 옛 지역에서 ‘개성 팔관회(八關會)’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해마루촌 마을회관에서 열린 자유토론 시간에 각각 가슴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꺼냈다. 김명희 통일인력거 대표, 장의균 헌법문제연구소 대표,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민승준 개성관광추진본부 공동위원장 등 주요 인사들의 발언을 정리, 소개한다.
“통일운동 없이 통일활동만 하는 남한사회” 김명희 통일인력거 대표

김명희 통일인력거 대표
“정전선언 평화협정 체결 촉구, 끝까지 해보겠다는 생각하고 있다. 한국사에 통일운동 가장 큰 단체가 6.15남측위다. 대한민국 통일운동진영 다 포괄돼 있다. 그런데 정부에 대해 그냥 입 다물고 있다. 문재인정부한테 왜 (남북) 합의사항 이행안하느냐, 말을 못하는거다. 저는 남한사회 통일 운동은 없다고 본다. 통일 활동이 있을뿐이다. 운동과 활동 차이는 활동은 그저 움직이는 것이고 운동은 현재 모순(矛盾)을 극복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움직임을 갖고 앞으로 나가야하는게 운동이다. 이런 문제의식 갖고 있는 분들 개인과 작은 단체 몇 개 있을거다. 이런 행사에서 그런 세력들이 자꾸 힘을 키워서 통일운동 함께 하는 계기 되면 좋겠다.”
“개성팔관회 남북공동개최 가능하다” 민승준 개성관광추진본부 공동위원장

민승준 공동위원장
“김명희선생님 광화문 단식농성할때 안타까웠다. 우리나라 사회가 단식으로 외치는데도 관심이 없더라. 개성지역에 3개마을 있다. 미군이 만든 딱 한곳만 정해서 사람들 살게한 곳이 대성동 마을이다. 판문점에 붙어 있다. 이곳 해마루촌은 실향민 위해 60몇가구 사는데 저렴하게 분양받아 은퇴하신분들 온다. 또 한마을이 경의선에 붙어있는 통일촌이다. 전혀 다른 형식의 마을이다. 대성동마을은 여자는 결혼하면 못들어간다. 남자는 결혼하면 아내를 데려올수 있다. 해마루촌은 돈주고 집과 땅을 살 수 있다. 개성생태운동을 하는 정강주 선생도 이곳에 산다. 개성특산품으로 인삼만 아는데 개성매화꽃, 개성매실도 있다. 개성이 고향인 허준선생은 개성 매실로 전염병을 다뤄 어의가 되신 분이다. 개성 대마(大麻)도 있다. 대마는 약도 쓰고 옷도 만든다. 북측에선 많이 심는다. 중국 다음으로 개성 대마가 유명하다. 생태 복원 위해 나무심기로 이곳과 인연 맺었는데 주민들과 연대는 아주 먼 길이다. '땅사서 공동체로 와서 노년을 여기서 보내겠다', '개성에 살고 싶다' 하면서 오는게 이 마을이다..고려공민왕 별궁터가 있고 도라산 백악산 작은 터에 빌리지 지으면 살만한 곳이다. 옛 개성지역 땅을 파면 어마어마한 문화재 나온다. 고려청자는 개성청자라해도 과언 아니다. 지금 남은 고려청자는 99% 죽은 사람 위한 청자다. 무덤에 넣어 내세에서 쓰시라는 청자다. 개성팔관회가 고려청자 배경, 청색이다. 안내문도 청자색이다. 프로그램 정말 거창하다. 1100여년 개성팔관회 남측지역 북측지역 공동개최는 정치결단만 내리면 할 수 있다.”
“통일될때까지 한라에서 백두 마라톤 뛰겠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여러분은 대의(大義)를 위해서 통일운동 하시겠지만 전 지극히 개인적으로 하다가 통일마라토너, 평화마라토너가 됐다. 평양이 고향인 아버지 살아계실적에 가족얘기 거의 들어본적이 없다. 이산가족 찾을 생각안하더라. 증조부가 갑신정변때 경복궁 지키는 최초의 신식군인이었다. 저는 미국생활 25년 하다가 50이 넘어서 마라톤 뛰게 되었다. 한국인 최초로 미대륙을 마라톤 횡단한 분이 있다. 여러몇 스탭 거느리고 뛴 분인데 전 그럴 형편이 못되서 막연히 미국대륙 한번 달리면 좋겠다고 꿈만 꾸었다. 어느날 뉴욕 센트럴 팍에서 뛰다가 어떤 엄마가 유모차 밀고 달리는걸 봤다. 그때 찌르르 전기가 왔다. 내가 배낭은 못짊어져도 저런걸 밀고는 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정신이 유체이탈이 된거다 (웃음) 목숨 내놓고 미대륙을 완주하려고 욕심낸 것도 아니었다. 핸드폰만 있으면 된다. 위험하면 119전화하면 목숨만은 건지겠더라. 2등은 언제나 주목을 못받으니 주목받을 생각이 없었는데 노창현기자가 저를 스타로 만들었다. ‘수레밀고 나홀로 대륙횡단’ ‘강명구 아시안 최초다’ 미대륙횡단 마라톤은 한국인으로 두 번째인데 나홀로 마라톤은 아시안 최초라고 하니까 큰 일이 된거다. 그때부터는 사심(?)이 생겼다.(웃음) 시작할때 텐트 식량 등 실을 (특수)유모차 사고 보니 앞이 허전해 보였다. 당뇨병 후원이라든가 여러 생각하다 얼떨결에 생각한게 ‘남북평화통일’이었다. 그렇게 하고 달리니 내 이름은 기억못해도 ‘통일마라토너’라고 부르더라. 김춘수의 시가 생각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죽기살기로 유엔빌딩 골인하니까 노창현기자가 다음 도전이 뭐냐고 묻더라. 난 미대륙횡단도 얼떨결에 한거라 아무 생각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한마디 하시라고 묻는거다. 그래서 불쑥 한말이 ‘유라시아 마라톤 횡단’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기사를 딱 쓴거다. ‘강명구 씨 다음 도전 유라시아 대륙횡단’, 말 함부로 할거 못되더라.(웃음) 암만 생각해도 미국 횡단은 언어도 같고 내가 25년간 살던 곳이라 달릴만 했는데 유라시아 횡단을 하려면 중동을 통과하든지, 저 위로 시베리아가서 얼어죽든지, 총탄 맞든지 죽을거 같았다. 잊고 있다가 어느날 도서관에 갔는데 베르나르 올리비에 작가의 <나는 걷는다>를 보게 됐다. (고독한 도보여행자 베르나르는 4년에 걸쳐 1만2000km 실크로드를 걸었다) 목숨내놓고 할 일은 아니지만 좀도둑 몇 번 만나는거라면 충분히 감당할수 있겠다, 또한번 유체이탈이 됐다.(웃음) 떠날 때 항공권하고 돈 2천불만 있었다. 그 돈 갖고 몇박이나 하겠냐. 1년2개월 뛰어야 하는데 방법이 없더라. 무조건 저지르고 그다음에 생각해보자 했다. 광화문광장에서 출정식 열었는데 송영길 의원 부인이 와서 돈 2천만원을 주더라. 힘이 팍 솟았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017년 9월1일 출발하는데 프랑스동포 임남희선생이 떼제베 타고 와서 응원하며 2500유로를 건넸다.. 대한민국 빽 쎄더라 (웃음) 출발할때만 해도 압록강까지 갈 확신은 없었지만 가기만 하면 북에도 나의 값어치가 있을 것 같았다. 나를 통해 세계 만방에 보여줄수 있는 기회인데 안열어주겠냐. 그런 생각했다. 결국 북녘땅은 미완으로 못뛰었지만 대신 매년 한라에서 백두까지 (마라톤) 행사를 하고 있다. 지금은 임진각이 한계지만 인디안 기우제(祈雨祭)식으로 통일될때까지 계속 뛰겠다.”
“적을 지키는게 아니라 우리를 가두는 철조망” 장의균 헌법문제연구소 대표

장의균 대표
“대학 시절 군에 징집돼 전방에서 근무하게 됐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철조망이 적을 지키는게 아니라 우리 국민을 가두는 철조망이구나. 그런 고민을 하고 제대후 인혁당 선배들이 사형 당하고 제정구 선생이 빈민운동 할때 잠실에서 양아치 왕초 했다. 운동 하던중에 개마서원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했다. 서강대 복학하면서 원래 신방과였는데 역사로 전공을 바꿨다. 출판사 하다가 이번엔 전두환한테 걸렸다. 12.12전에 언론통폐합 있었다. 개마서원 비롯한 몇몇 출판사가 등록취소되고 남민전도 얽히고 그래서 일본에 유학을 갔다. 그때 세일즈맨으로 돈 모은게 있었다. 교토대에 가서 고대사 공부했다. 고려는 첫 통일국가다. 신라통일은 가짜다. 기왕 가는김에 개성지역 비무장지대를 통일 평화지대로 만드는 일을 하자 해서 교포들, 조총련 거류민단 서명운동 그거 하다가 ‘통일굿’ 황석영 조성우 선배들 틈에 끼었다. 부천 성고문사건 나고 박종철 고문치사까지 나고 우리가 흥분을 해서 누군가 지원 들어가야 하는거 아니냐,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나만 공식전과가 없었다. 남민전 사건때 끌려갔다가 고문만 받고 나왔다. 내가 제일 안전하다 해서 2.7대행진 3.3대행진하고 6월항쟁에서 김대중, 김영삼 두분 못빠지게 하는 책임 맡았다. 이부영 김덕룡 비선 노릇하다가 대대적 사건 만들기 시작했는데 6.29 지나니까 모신문 정치부장하던 친구가 ‘그만하고 일본 가라’ 하더라. 한겨레신문 만들던 친구들 한겨레 민주당 강령 조직 주비위 부위원장 했다. 한겨레 민주당 만드는 강령 처제 시켜서 타이핑하고 문서 넘기고 일본 돌아가기전날 사무실 살짝 들어갔는데 건물 전체 포위되고 보안사 애들이 잡아채서 그때부터 8년을 간첩으로 조작돼 징역살았다. (1987년 이른바 ‘재일유학생 간첩단사건’으로 8년옥고를 치룬 그는 재심을 청구해 2017년 무죄를 확정받았다.) 그때도 느낀 것이 38선이 우리 민족을 지켜주는게 아니라 가두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이 허리가 잘린게 아니라 미군 총부리에 허리가 찔려서 반신불수(半身不遂) 신세다. 이걸 그냥 빼면 사람이 죽는다. 척추를 벗어난 다른 통로들이 생겨서 총알을 빼도 괜찮을 정도로 위아래가 잘 소통이 되면 살수 있다. 그래서 저는 개성관광재개추진본부 민승준선생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안다. 판문점에 사람들이 많이 오고 비행기도 뜨고 피가 위아래로 잘 통하면 나가지 말래도 미군은 나간다. 총알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판문점을 만남의 집으로 하자. 그래서 오늘 함께 하게 됐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꼬리뉴스>
“통일일꾼의 준비를 하라” (2021.11.19.)
비전향장기수 임방규선생 특강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m0604&wr_id=105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