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현존재가 우리의 궁극상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비애에 애정을 가진다는 것은 비애에서 탈피하기 위한 것이다. 비애는 회향에서 방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환희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는 하등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궁극 목표는 비애와 환희에서 탈피한 의지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그것은 곧 사랑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의지를 통해 현존재의 자기극복을 거쳐 제 2의 자기완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애와 환희가 선과 악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것은 정신에서 정념의 경로가 아닌 자투의 경로 중 전반에 속하는 인식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는 판단에 기인한다.
자투의 경로는 인식의 궁극상태에서 의지로 이어진다. 의지로 이어지는 인식의 끝부분은 평가판단에 속한다. 이러한 발전적 자투의 경로와 대비되어 정념의 경로도 이제 ‘불일치에서의 해방을 의욕하는 것’으 로 이행하는 것이다.
불일치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는 욕망이 인식의 평가에 따른 가치와 결합될 때, 그에 따른 정념은 존경과 경멸이다. 따라서 존경과 경멸도 욕망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존경은 그것의 가치를 유지⋅ 보존하여 그곳으로 계속 향하게 하는 경향을, 경멸은 낮은 것을 주시하여 그곳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경향을 가진다.
인식이 모든 종류의 대상에 대해 일반적으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처럼, 존중과 경시라는 정념도 모든 대상에 관계 될 수 있다. 여기에 자유의지가 결부될 때, 즉 그 대상이 자유의지에 의한 자기전개의 법칙을 가지는 존재일 때 그것에 대한 평가 는 존경과 경멸의 정념이 된다. 이것은 그 대상이 오직 자유인인 인간에 국한되는 정념이고 사물에 대해 갖는 정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또 존경과 경멸이라는 정념은 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란 자유의지를 가지는 존재이나 그 본질이 인간 위에 있다는 면에서 경멸과 존경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존경과 경멸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냐 아니냐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존경 때문에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책임적 소재 때문에, 우리가 이유 있는 칭찬이나 정당한 비난을 받는 것은 자유의지에 의존하는 행위에 대해서뿐이다. 의지적 활동에 대한 자유의지의 지배력을 부정하는 것은 비겁하기 때문에 자유의지의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결코 자기원인으로서의 자유의지가 가지는 지배력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자유의지를 가지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자유의 실체 바로 그것이다.
자유의지에는 책임이 전제된다. 자유의지를 사용할 때, 스스로 최선이라고 판단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현하려는 의지를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않을 것과 완전한 덕을 실현하려는 확고부동한 결의를 자신 속에서 느끼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인간은 고매한 어떤 존재, 즉 참된 고귀함의 극점까지 높여진다. 고매한 인간은 오직 자신의 내적 법칙만을 가지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서는 비-의존적이며 타인의 정념을 자신 속에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인(das Man)의 비난이나 칭찬으로 인해 동요되지 않는 의연함을 지닌다. 동시에 고매한 인간은 타인을 경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타인에 비-의존적인 자기의지에 의한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타인도 자기와 동일한 자기 책임적 존재로 보며, 그런 인식과 감정을 가진다고 확신한다.
정념은 그 자체로서 인식이 되지는 않는다. 공통의 것을 추리하는 능력이나 종합, 통일의 자발성이 감성에는 없다. 정념은 인식을 요청한다.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은 외경이라는 정념에 의해 안내된다. 내적 자기존재로 인식을 안내하는 힘은 존재 자체와의 일치가 지닌 흡인력이다.
정념은 현존재와의 일치에도 관계하나 존재 자체와의 일치에도 관계한다. 정념과 이성은 존재 자체가 가지는 힘이다. 여기서 존재 자체는 자기원인에 의해서 자체로 안내하는 실체다. 이성에 의해서는 존재 자체를 확인할 수 있고, 정념에 의해서는 존재 자체의 속성을 체험할 수 있다.
인식은 판단의 형태로 존재 자체인 고향을 발견하지만, 그 고향은 공허 속에 있기에 부분적으로 인식될 뿐 체험되는 것이 아니다. 정념은 무개념 상태에서 체험으로 주어진다. 인간은 정념에서 자신이 회향적 존재임을 체험한다. 인간은 모르는 것과 관련해서도 처음부터 공포와 신비를 체험하며, 이 체험으로 인해 실재와 비실재,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을 추구할 수 있다.
육체⟶정념⟶정신이라는 발생론적 견해에서 육체가 정신의 기저가 된다는 것이 유물론의 기초를 형성한다. 이것은 경험적인 고찰이다. 이렇게 육체가 정신으로까지 높여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진행을 미리 예정한 하나의 정신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설이 생기고 이러한 가설은 현실적 경로인 육체에서 정신으로 이행하는 경험적 사실에 의해 증명되고, 동시에 이 경험적 이행은 그 가설에 의해 설명된다는 논리를 통해서 유심론의 기초가 형성된다. 이런 면에서 유물론과 유심론 양자는 공히 위대한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
그러나 존재를 가능성과 실재성의 관점에서 고찰하면 존재의 본질을 불일치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발생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이 육체적 존재라고 하더라도 여기엔 가능성과 실재성 사이의 불일치가 있다. 그 속에 충분히 정신적 존재로까지 높여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그것이 불일치의 운동에 의해 정신적 존재로까지 높여진다고 할 수 있다.
육체적 존재가 정신적 존재로 높여졌을 때 가능성은 실재성을 통해 유(有)로서 확인되는 것이고, 그것이 확인되지 않을 때는 오직 순수 가능성 속에 있을 뿐 무(無)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능성 자체는 ‘유이자 무’이기에 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심론은 다만 정신적 실현이 이루어질 경우에만 성립된다. 만약에 인간이 정신적 존재로까지 높여진존재가 아니라면 유심론은 붕괴될 것이다.
이에 반해 유물론은 그 시작이 정신적 전제가 없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유심론보다 유물론을 좀 더 논리적인 해석에 의해 긍정할 수 있고, 유물론이 현존재에 대해 더 현실적이고 긍정적이고 진리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유심론은 그 정신적 예정을 오직 논리적 가설과 확인이라는 순환에 의해 확인할 뿐이고 발생적 생성 자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반면에 유물론은 발생적 생성과 실재성에 대한 강력한 설명력에도 불구하고 육체에서 정신으로 높여진 존재가 다시 이 정신에 의해 주도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존재의 근원이 어디냐에 대해서는 유물론이 답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고향으로의 회귀가 문제인 한, 존재는 벌써 탈존재를 위한 근거일 뿐이다.
좀 더 중요한 것은 상반하는 양자의 상충적 불일치이다. 철학의 역사적 논란을 해결하는 것이 철학에서의 회향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존재로서 가능성과 실재성을 가진다. 그 전제인 가능성과 그 궁극적 귀결인 완전한 실재성, 즉 가능성 ⟶가능적 실재성⟶완전성의 전 과정을 통해 우리는 유물론과 유심론을 포괄적으로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존재의 가능성과 실재성의 과정은 유물론적 입장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순수 가능성과 실재성의 연쇄는 논리적인 것으로 유심론에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 과정에서 현존재를 고찰하며, 또한 유물론과 유심론의 불일치를 해소하고자 한다. 현대 철학의 논의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의 충돌을 피하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모색하는추이도 인간이이러한불일치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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