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31)
****사랑하는 내님
아이들에게는 필기를 하라하고 저는 낙엽이 뒹구는 창밖을 내다 보고 있습니다. 운동장 한 모퉁이에서 누가 낙엽을 태우고 있습니다. 연기가 이리저리로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환상적으로 보입니다.
음산한 날씨 잿빛 하늘, 대지에 뿌리 박고 있는 것들의 가슴속 깊은 곳
에서 울려 나오는 영혼의 소리가 퍼져 올라 가는 듯 합니다. 당신도 저
기 겸허한 자세로 하늘을 우러러 보고 서 있는 듯 합니다.
이런 가을이면 당신은 바람소리를 내며 바바리를 펄럭이며 바쁘게 다니
셨지요. 의대 학내 정화운동 <히포크라테스정신운동>, 유신철폐운동을 주
도하고 그러면서도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시험공부를 하고 애인을 만나
깔깔낄낄 웃겨줘야 하고 친구들 만나 담소하고 동지들 만나 토론하고.
조시복씨는 저에게 “현某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지 정말 불가사의입니다”하시더군요
이제 졸병이 되어 그곳에서 이런 계절을 맞는 당신은 또 어떤 감회를
가슴에 안고 있습니까.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당신에게
닿는 길은 너무 멀고 그리운 마음은 가슴에 넘실거립니다.
사랑하는 내님, 지난 번에 갔을 때 그곳에서 머물고 아예 오지 말 것을. 당신이 제대할 때까지 민가에 방을 하나 얻어 뭐라도 하며 내 입에 풀칠
이나 하더라도 당신 옆에 살 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날 신은 나를
당신의 우주 속으로 인도해 주셔서 그날부터 저는 당신만 바라보며 당신을 사랑하는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 개체의 종말이라고
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솟아 오르는 새로운 날에 대해서 경건해야 한다. 일년 후의 일을, 십
년 후의 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오늘을 생각해라. 네 이론을 버려라. 미덕
에 대한 이론도 버려라. 역시 좋지 않고 어리석고 해로운 것이다.
삶에 무리가 가서는 안된다. 오늘에 사는 거다. 나날에 대해서 경건해야
한다. 회색빛이 도는 우중충한 날도 역시 사랑해야 한다. 불안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겨울이다. 모든 것이 잠잔다. 하지만 좋은 땅은 미구에 깨어
날 것이다-----.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쟝 크리스토프’에 나오는 말입니다. 빛을 잃어가는
이 계절에 수분이 말라가는 가슴을 향하여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우리들에게 일러주는 말입니다.
상열씨 편지 반갑게 읽었습니다. 곧 답장 내겠습니다. 대구 양쪽 부모님도 별고 없으시고 우리 엄마는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시는 듯 했습니다.
영순 진미 수남이는 아주 열심히 대학생활을 보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주말이면 좋아하는 교수님을 한분씩 모시고 산을 찾아 간다 합니다
1976년 11월 6일 노야.

----노야 보십시오.
주신 글 잘 받았소. 언제나 노야의 글은 거듭거듭 읽게 만드오. 생활은 퍽 안정되어 있고 즐겁소. 전번에 주소를 잘못 썼던데 바로 써 주시기 바라오. 짬을 내어 남산동 어머님께 글월 올리도록 하겠소.
좀 있으면 또 오래도록 편지 못 할지도 모르니 그때까진 자주 하도록 하겠소. 시간이 무척 빨리 흐르고 있소. 눈이 내리는 때가 오면 만날 수 있겠소. 영순 진미 수남이가 충실한 생활을 한다니 반가운 얘기요. 나도 충실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부풀어 오고 있소.
노야 혼자서 밥해 먹으랴 학교 가랴 무척 피곤하고 고달프리라 생각하오. 생각할수록 송구스러운 일이오. 그러나 지금 이 시간들은 우리에게 금싸라기 처럼 귀한 시간이니 꿋꿋이 밝은 마음과 건강하고 젊음이 넘치는 생활을 하시기 바라오.
하늘에 지는 석양, 푸른 창공, 그리고 노야가 계시니 나는 기쁨으로 가슴이 넘실대오. 이제 내 마음이 다른 사람 소식을 기다릴 정도로 밖으로 향하지 않으니 그저 노야만 편지 자주 받는 즐거움을 주오. 인식이 한테도 종종 소식 전하오. 효.
11월 13일 목, 1975년
아! 내가 설 땅은 과연 어디냐? 펑펑 울고 싶고 가슴을 찢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인다. 나는 싸우리라 그리고 입술을 악물고 버티리라. 어딜 가도 이 군대란 곳에서 내가 설 자린 없다.
책을 보겠다는 나의 의지는 가는 곳마다 난관에 부딪친다. 그 글들 속에 얼마나 황홀하고 인생의 진미를 넣어주는 길이 있음을 모르는 저 벌레보다 못한 인간 군상들. 그들에겐 내가 가시고 괜히 할 일도 없으며서 책을 보면 싫어한다.
그러나 나는 싸우리라, 끝까지 싸워 나의 인생의 깊이를 더하리라. 노야
내 사랑, 나를 지켜다오. 저 알량한 장교들을 봐라. 주간지나 뒤적이거나 헛소리만 늘어놓는다. 왜 이 모양인가. 정말 사람들이 사는 세계 속에서 숨을 쉬고 싶다.
어제부터 을씨년스러운 비만 추적거리고 날씨는 더욱 차가워 졌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춥지 않은 모양인데 나는 추워 못 견디겠다. 그리고 잠은 5시간 내외다. 이건 숫제 환장할 지경이다. 차라리 힘에 겨운 훈련이나 떠날까 보다. 저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고등 짐승들 사이에서 나의 철학은 숨이 막힌다.
오늘 문득 쓰레기를 불에 태우다 어머님 아버님이 생각났다. 얼마나 두분의 가슴을 태워 드렸던가. 얼마나 가슴 조리게 했고 불효를 했던가. 불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자니 불현듯 잊고 있었던 나의 불효가 가슴에 불이 되어 숨을 가쁘게 한다. 달려가고 싶다. 어머니 아버지 그분들이 나에게 계신다는 것 나는 그걸 너무도 늦게야 깨닫는 것 같다.
아버님 어머님 건강하세요. 당신 곁에 있을 땐 부족하고 아쉬운게 하나도 없었어요. 소자는 그걸 몰랐어요. 저는 지금 목이 막히는 울음을 삼키고 있습니다. 늙으셨지요. 아버님 어머님 저희들은 항상 마음은 철새였었고 아버님 어머님은 매일 보는 산처럼 하늘의 해처럼 그렇게만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많이 늙으셨어요.
춥다. 추워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왜 이렇게 추운가. 몸도 춥지만 가슴이 추워 옷만 자꾸 껴입지만 몸과 마음이 자꾸 움츠려든다. 그러나 나는 싸우리라.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내 하고 싶은 최소한의 자유를 지키리라.
저 얄팍하게 살아온 군의관들을 닮고 싶지 않다. 가슴이 활활 타고 뜨뜻하
고 배짱 강한 쫄병이 되고 싶다. 오늘 밤엔 아버님께 편지 쓰리라. 아, 그리워라 그날들. 이 추운 내 몸과 가슴은 어머니 곁에선 휴식을 취하고 안식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오직 노야만이 나에게 끓는 열기를 줄 수 있다. 나는 지금 어머님과 노야가 필요하다. 두 놈에게 동시에 책을 본다고 욕을 얻어 먹다. 나는 싸울 거다. 느긋한 배짱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 적어도 여기선 말이다. 마이동풍이 되는거다. 노야 보고싶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나는 지금 이 말 밖에 적을 수가 없다. 오 나의 생명 사랑한다오 진정으로.
11월 14일 금. 1975년
계속 비. 잠이 오고 고달프고 책은 못 보고. 오늘 고참병들끼리 훈련소 얘길 한다. 지난 날의 그 괴롭던 상념들이 머리에 하나하나 명주실처럼 풀려 나온다. 황토의 교육장. 모래 먼지, 욕설, 구타, 주린 배. 죽고싶도록 괴로운 상념들.
그러나 지난 날은 오히려 애틋한 연민으로 나에게 덮쳐온다. 눈을 감으면 마치 지금도 내가 그곳에 있는 양하다. 얼마나 노얄 그리워하고 엄마를 그리워하고 내 자신을 상대로 얼마나 부단한 투쟁을 계속해 왔던가!
그러나 지금은 씁쓸하고 날커피 같은 쓴맛으로 그날들의 추억을 되삭임하고 있다. 노야의 첫 편지를 받고 벽에 기대 눈물을 뿌리던 기억, 지금도 가슴이 울렁인다. 그날 기차로 double bag 을 짊어지고 기대와 환희에 부풀어 떠나
던 날 가슴이 저려온다. 누구보다도 나에겐 가슴에 사연이 많았다.
이제 또 나는 나의 욕망때문에 부단히 싸우고 있다. 책, 책이다. 나도 저들처럼 간단히 생각하고 쉽게 살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그저 권태로우면 귓밥이나 후비면서 지낼 줄 아는 저런 지혜가 있었더라면. 이것은 나에게 형벌이 되어 밀려온다.
노야는 지금 수업을 하는지 아마 거기에도 비가 뿌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11월 15일 토. 1975년
민방공 훈련이네 뭐네 하며 매일 똑같은 하루다. 이젠 내가 책을 보면 숫제 전기불을 켰다 껐다 한다. 그저 그들이 살아온 길이 그러했고 그런 상태로
그대로 감수해 온 놈들이라 그러려니 생각하니 가련한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책을 놓지 않는다. 그러다 저들도 지치리라. 나의 이 독서벽 때문에 연대에서도 나의 인격까지 모독당하던 일이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이 고통
과 아픈 사연은 훗날 반드시 보상 받으리라.
어제 밤엔 아버님께 편질 썼다. 노야 널 안는 장면을 환등기처럼 내 머리
속에 수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보고프다. 그립다. 너는 나의 생명, 천사
그립고 보고푸다.
오랜만에 날이 개인다. 나에겐 태산같은 배짱이 나를 지켜준다. 나는 이기
리라. 그리고 버텨 나가리라. 어떤 사악한 의지도 나를 패배시킬 순 없다.
나에겐 사랑하는 노야가 있지 않은가. 나의 생명 너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밤엔 공기가 무척 신선하고 경치가 좋다. 넓디 넓은 하늘엔 달이 하나, 그
리고 촘촘히 박힌 별들. 저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은 어찌 그렇게 부대끼고 질식하고 있는가. 나에겐 노야가 있는데. 이제 이 한 권의 일기장도 끝이다.
곧 RCT 훈련을 나가면 새로운 일들과 경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이 세
상에 무릇 의미가 제시하는 사건들에 의해 해명되지 않는 의미 –그것은 암
호라 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다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경험에 의해서 나의 실존에 접근해 올 수 있다.
씩씩하고 장한 전사처럼 나는 이제 새로운 훈련을 향해 떠나리라. 가슴을 펄럭이면서 그리고 하늘과 초월을 생각하면서 나는 낙엽이 밟히는 산을 걷
고 차가운 시내를 건느리라. 이름 모를 저 산들이 나를 부른다.
안녕 노야
잘 자.
11월 16일 일. 1975년
일요일이지만 계속 RCT 훈련준비를 하며 하루를 보내다. 날씨가 오랜만에
쾌청. 그냥 그렇게 지나간 하루. 노야를 그리워하다 곁에 있으면 못 느끼고
떠나 있으면 둘만의 시간을 더 가질걸 하며 노상 아쉬워 하게 된다.
사실 노야를 보고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져서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
른다. 그래서 노얄 볼 땐 노상 처음 만난 사람처럼 새롭고 신비스럽다. 네가 무척이나 그립다. 性愛, 연애, 결혼이란 건 인간사랑의 계보이고 결혼이란 생각할수록 신비스럽고 위대한 인간의 조합이다. 모든 진리가 두사람 사이의
진리이듯이 이 사랑이란 것도 의존이다. 그저 생각만 해도 달콤하다.
노야와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사랑의 couple이 되고 싶다.
이곳 남자끼리의 생활에서 듣는 바 그들은 소위 화류계의 여자들과의 육욕
을 취하는 것을 최고로 만족해 하는 것 같다. 그것이 고등 콜걸일 땐 그 관
능적이고 말초적인 사랑의 유희에 모든 정신적인 숭고한 사랑이 빛을 잃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남자란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도 노스탈쟈처럼 그런
곳을 막연히 동경하고 몸을 빠뜨린다.
그러나 나는 나의 영과 육의 모든 사랑을 오직 노야에게서만 찾고 갖고 싶
다. 그래서 노야가 내 곁에 있을 때는 언제나 황홀하다. 나의 한가닥 실처
럼 가는 사랑의 모든 양상의 파편조차도 나는 노야에게서만 찾고 싶다.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행태를 오직 나의 생명 노야에
게서만 발견하고 싶다. 나의 뜨겁고 아름답고 착한 악마가 되어다오.
나는 또 기억한다. 언젠가 둘이서 <보니와 클라이드>, 워렌 비티와 페이
더나웨이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 노야가 마치 아이처럼 깡충깡충 뛰
면서 한 장면을 재연할 때 아! 그 사랑스러움, 그때 온몸에 찌르르 전기가
오던 그 사랑스러운 몸짓을 잊어버릴 수 없다. 노야, 우리 늙지 말자. 우
리는 결코 시간의 한계정황에 묶여버리는 사람이 되지말자.
이제 또 하루가 당겨졌다. 나의 천사가 나의 곁으로 날아올 시간이 당겨졌다. 건강해 다오. 밝고 뜨겁고 현명하고 그리고 숨막히는 나의 천사야!
안녕 잘자요.
***그리운 당신께
따뜻한 양지를 찾아 자리잡고 앉아 있습니다. 어제는 수업을 여섯 시간이나
하고 피곤해 죽겠다가 당신의 편지가 두통이나 날아오니 신이 나서 몸이 날
아갈 것 같았습니다. 기인 밤 잠벌레인 제가 잠은 오지 않고 몇번이나 읽었
는지 모릅니다.
이곳은 아직 춥지 않습니다. 밤이 길어 차라리 빨리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
가 날이 희부염해지면 빨딱 일어나 방문을 열고 동이 터오는 곳을 바라보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저 1분이
라도 더 이불 속에서 있을려고 눈만 빠꼼히 내놓고 벽시계만 초조히 보고 있었지요.
추수가 끝나고 나면 텅비어 쓸쓸해 지리라 걱정했는데 그래도 아침이면 밥 짓느라고 집집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게 보이고 산이 거무스레하
게 둘러 서있어 푸근하고 여기저기 보리 파종을 해놓아서 파릇파릇한 것도 생기있게 해줍니다.
추워지면 당신이 걱정됩니다. 새벽에 얼마나 으시시 할까. 인식 씨께 편지
했어요. 당신이 저를 사랑하는만치 그녀를 사랑해주라 했어요. 당신이 보
고싶으면 먼 산을 바라 봅니다. 얼른 집에 가서 당신의 사진을 보고 싶은
데 아직도 몇시간 더 있어야 집에 갈 수 있습니다. 몸조심하시고. 안녕.
1975년 11월 12일 노야.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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