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58)
<그 어른들은 아직도 살아 계실까?>
박정희의 압력인지 현승효는 1974년 12월 15일 경북대 의대에서 제명이 되고 18일날 바로 졸병으로 입영통지서가 날아 왔다. 2월 22일날 의성에서 장정들이 모여 논산으로 간다는데 응할 것인가 불응할 것인가 수없이 생각해도 결정을 못 내리고 소집일을 하루 앞둔 날 21일도 종일 초조해 하며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그를 보니 하늘같이 보이는 님만 믿고 천방지축이던 내가 무섭게 냉정해졌다.
군대 가는 거로 결정하라 했다. 수배를 피해 도망질하다 예민한 사람이 피말리다 죽을 것 같았다. 눈 딱 감고 가라고 기다리겠노라 했다. 그 말에 긴장을 확 풀고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달빛이 차겁게 쏘아내리는 겨울 밤, 천지는 눈으로 하얗게 덮여있고
그 밤 주강선생님께서 직접 운전하시는 피아트차로 의성으로 갔다.
사랑하는 동생들 경대의대 간호학과의 백의의 천사들 정영순 빅진미 서수남이도 함께 갔다.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짖궂으시게도 갑자기 커다란 렌턴을 꺼내어 불을 환하게 키시고는 뒷좌석에 앉아 왜 저러시나 하는 우리 둘의 손을 확 비추시고는 역시! 하고 껄껄 웃으셨다. 물론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있었지)
좀 가다가 선생님께서 차가 너무 무겁다고 하시니 수남이가 선뜻 내리겠다 했다. 팔달교 근처이던가 차에서 내려 깜깜한 밤 인적이 없는 대로를 건너는 수남이의 뒷모습이 아직도 가슴에 쨍하다.
늦게 의성에 도착하니 작은 촌바닥에 몇 안되는 여관마다 논산 가는
촌놈들로 방이 꽉 차서 낭패해 하는 우리를 잠자코 보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아! 하고 소리 치시더니 <공생병원>으로 차를 확 몰으셨다.
그 의원 원장님이 그때는 미국에 있던 제자의 삼촌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시고.
수인사를 하시고 선생님이 승효씨가 강제입대하게 된 그간의 경위를 말씀해 드리니 원장님께선 숙연한 표정으로 들으시고는 “아무리 그래도 이런 폭력은 있을 수 없다” 하시며 치를 떠시었다.
그날 밤 선생님과 영순이와 진미는 대구로 돌아가고 원장님 부부께서는 가만가만 말씀을 나누시더니 우리 둘에게 원앙금침에 병풍까지 있는 정갈한 방을 내 주셨다. 독재자의 폭력으로 강제로 헤어지는 우리가 불쌍하셨던지 이 어른들은 우리를 정식부부로 인정해 주셨다.
나는 그래도 잠을 좀 잔 것 같은데 초조와 긴장으로 그는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하는 것 같아 보는 나도 너무 힘들었다. 피를 말리는 듯한 거친 숨소리만 쌕쌕 들리고 우리는 손이라도 잡고 있었는지 기억도 안난다. 아침이 밝아오니 사모님은 정성스럽게 차린 아침밥을 겸상해서 주시고,
아! 그 어른들이 지금 살아 계실까?
원장님은 그를 빼내 주시려 쉽지않은 일을 단행하시기로 결심을 하시는 것 같았다. 날이 밝자 사무장을 불러들이고 사무장은 연방 들락날락하며 보고를 드리고....
원장님은 승효씨 항문에 포도당 주사를 놓아 일시적으로 치질상태로 만들어 잘 아는 군의관에게 자초자종을 말해서 귀향조치를 하신다는 거였다. 그때 승효씨는 최대의 예를 다하여 원장님께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이 은혜 어떻게 다 갚겠습니까? 하지만 선생님께 누를 끼칠까도 두렵고 만약에 뜻대로 안되어 입영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서 그냥 제 몸 컨디션 이대로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했다.
원장님은 "아니야 해 보는데까지 해 보는거야, 이대로 보낼 수 없어" 하시며 단호한 표정을 하시며 주사를 놓으셨다. (이날 부터 꼭 넉달 뒤에 우리는 다시 만났는데 포도당 반응은 전혀 나지 않았다며 히히 웃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다 큰 자식이 너무 점잖으면 소외감 느끼신다며 엄마 아부지 앞에서는 개막내이, 날 웃기느라 내 앞에서는 늘 바보 맹구영구같이 행동하여 맨날 "바보같애" 그랬는데 그 말을 할 때의 그는 얼마나 사려깊고 신념이 있는 늠름한 청년의 모습이던지 참 아름다웠다
잘 되어 간다 하시더니 아니나다를까 좀 있다 사무장이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시커먼 선글라스를 쓴 가죽잠바 아저씨들이 등을 탁탁치면서 괜한 짓 하지 말고 돌아가라 하더라며 벌벌 떠셨다
원장님의 위험한 시도는 입대하는 것을 확인하려고 신병 집결지인 의성까지 출장 온 가죽잠바부대 정보요원들에 의해서 차단되었지만 그를 우리 품으로 돌려보내 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던 원장님의 모습과 사무장님의 수고는 평생 잊을 수 없고 의인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을 굳게 믿게 돠었다. 살아 계실까? 지금 그분들이 가슴 사무치도록 그립다
(2006년 6월 29일, 29주기를 맞으며, 노야)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