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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희, ‘불멸의 남자 현승효’
1974년 경북대 의대 본과2년, 박정희유신독재 철폐운동 주도하다 제명후 강제징집돼 제대 4개월을 남기고 폭염에 완전군장 구보훈련중 사망한 현승효. 그에겐 뼈가 녹고 피가 말라도 식지않는 불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28개월간 수첩에 빽빽이 적어놓은 그립고 애달픈 연인의 사연들, 30년만에 빛을 본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를 뉴스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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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회향학적 원리(6)

현승효사상
글쓴이 : 현승효 날짜 : 2023-03-29 (수) 16:10:40

현승효사상

 


 

그러면 불일치 자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운동이다. 이것은 헤겔의 위대한 발견으로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순수한 불일치는 연속적 지속상태를 이룬다. 끊임없이 경신해가는 지속 속에 있지 않으면 불일치는 단순한 간격에 불과한 것이 된다. 고정되고 정지된 불일치는 단지 간격 내지는 상이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동일한 시간에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두개의 돌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간격과 상이함에서는 어디서든 불일치의 전제인 일치가 필연적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일치라는 전제와 무관한 우연적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불일치가 아닌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하는 불일치는 일치의 파생적 전개다. 완전성에 도달하기 전까지 실재성은 전체 가능성에 대해서 늘 결여상태로 있다. 그 결여는 한계를 의미한다. 인식자체를 회향적 존재인 자아가 비아에 대응하는 과정으로 볼 때, 인식은 필연적으로 결여가 될 수밖에 없다. 증대해 가는 인식, 파기되는 무수한 진리를 감안하면, 현존재적 자아에 속하는 오성은 결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언제나 실수를 할 수 있는 존재다. 우리가 가능성의 결여인 실재성 속에서 완전성에 도달해가는 과정에 있는 한, 불일치는 불가피하다. 우리가 이러한 과정 속에 있는 자아로 존재하는 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불일치 속에 있는 인간이다.

 

가능성에 대해 닫혀 있고 가능성에 맞서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의 불일치라는 질곡과 관련해 왜 인간의상태는 현재와 같은가라는 근본 물음을 제기할 때, 이에 대해 합리적 해답을 얻을 수는 없다. 우리의 근원적 존재로서의 가능적 고향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고, 우리는 현존재 상태에서 늘 실향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개 속에서 신화의 힘과 계시의 권위는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의 형태로 해답을 준다. 그러나 신화나 계시의 해답은 그 자체로 다만 고향의 소재 확인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미 시위를 떠나 공간을 날고 있는 화살이 되어 있다.

 

일치불일치일치

 

문제는 화살이 어떻게 그 과녁인 순수한 나의 본성과 존재에 안착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신비적인 예배의식 및 생활태도가 답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성이 아니라 관습의 형태로 주어진다. 우리가 회향적 본성의 순수성을 획득하는 것은 일체의 불일치가 해소되어 운동이 소멸된 곳, 과녁에 화살이 정지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신비적 예배의식과 생활태도가 이미 하나의 자연적 운동양식인 회귀와 복귀라는 원의 형태로 전락했다면, 원과의 접점에서 또 다른 직선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반성을 통해 진행되어야 한다. 존재 이전의 상태인 가능성, 즉 진아가 완전성을 이룰 때, 다시 말하면 가능성이 완전성의 차원에서 실현될 때 가능성과 실재성, 본질과 존재는 하나로 용해된다.

 

이러한 최고의 상태야말로 우리 인간이 회복해야 할 고향이다. 이 상태에 도달하여 세계와 합일을 이루는 존재를 범아(梵我)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도달하기까지 현존재적 자아는 항상 가능성과 실재성의 불일치 속에 남아 있으며, 이 불일치야말로 현존재적 자아를 이해하는 열쇠다.

 

가능성과 실재성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전 우주적 대상에 공히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생물이나 무생물은 이 가능성을 스스로 실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인데 비하여 인간은 스스로 회향적 존재로서 가능성을 실현해가는 자유의 존재다. 가능성 자체는 존재의 피안에 있는 것이며, 여기에 실재성과의 투쟁적 상충은 없고 오직 가능성 자체의 일치밖에 없다.

 

가능성과 실재성의 불일치를 경과하여, 다시 가능성과 실재성의 완벽한 통일인 실재적 완전성에서 일치가 이루어지는 복귀의 경로가 회향이다. 이로써 회향 전체는 일치불일치일치

경로를 따라 진행된다.

 

인간은 불일치를 거부하는 존재로 불일치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여 불일치에 대한 불일치를 수행하는 존재이며, 그리하여 일치를 목적하는 존재, 즉 회향적 존재다. 이 목적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즉 우리의 진아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현재적 과정인 자아는 바로 회향의 미로 속에 위치하고 있는 존재다.

 

예컨대 기독교의 원리를 보면, 에덴동산에서 하나의 일치 속에 있던 인간이 원죄에 의해 추방되는 것은 분리를 의미하며 나아가 기독교의 소망은 이 분리에서 구제되어 다시 신과 교감하는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불교에서도 동일하다. , , , 풍 네 가지 요인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번뇌하는 존재다. 그는 자신의 원래 본체가 공이고 무임을 알기에 목적의 왕국인 열반에 이르고자 한다.

 

또한 맑스주의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나 물신적 지배의 갈등으로 본다. 그 필연적 귀결로서 맑스가 상정하는 것은 일체의 착취나 질곡이 해소된 이상향, 국가마저 사멸하는 공산사회다. 이러한 공산사회에 대한 조명을 그는 원시공산사회로부터 얻는다. 그는 원시공산사회에서 계급지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거쳐 공산주의의사회에 이르는 과정을 설정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모든 부차적 조건들을 추상하면 일치불일치일치라는 도식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것이 오직 인간에게서만 발견되는 하나의 순환인 한, 이러한 순환은 바로 객관성과 그 진실성을 요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에 따라 우리는 인간이 회향적 존재임을 확인하고, 회향의 완전한 실현과 범아의 형성을 위한 좌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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