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 파리 : 서울 :   시작페이지로 설정 즐겨찾기 추가하기
 
 
 
꼬리뉴스 l 뉴욕필진 l 미국필진 l 한국필진 l 세계필진 l 사진필진 l Kor-Eng    
 
미국필진
·권이주의 美대륙을 달린다 (151)
·김동석의 워싱턴워치 (79)
·김수복의 자력갱생 북녘경제 (21)
·김중산의 LA별곡 (71)
·김창옥의 빌라레비 훨훨 (17)
·김태환의 한국현대사비화 (80)
·김현철의 세상보기 (135)
·노정훈의 세상속으로 (31)
·노천희, ‘불멸의 남자 현승효’ (88)
·로빈의 스포테인먼트 (109)
·세등스님의 세상과 등불 (5)
·신필영의 삶의 뜨락에서 (35)
·오인동의 통일 고리-Gori (50)
·장호준의 Awesome Club (152)
·피터 김의 동해탈환 이야기 (52)
·한동춘의 퍽 환한 세상 (15)
·한종우의 시사아메리카 (13)
노천희, ‘불멸의 남자 현승효’
1974년 경북대 의대 본과2년, 박정희유신독재 철폐운동 주도하다 제명후 강제징집돼 제대 4개월을 남기고 폭염에 완전군장 구보훈련중 사망한 현승효. 그에겐 뼈가 녹고 피가 말라도 식지않는 불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28개월간 수첩에 빽빽이 적어놓은 그립고 애달픈 연인의 사연들, 30년만에 빛을 본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를 뉴스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총 게시물 88건, 최근 0 건 안내 글쓰기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인간의 회향학적 원리(7)

가능성과 실재성
글쓴이 : 현승효 날짜 : 2023-04-02 (일) 18:16:37

가능성과 실재성

 

 

인식의 가능성은 감관과 오성에 주어진 선험적 능력이다. 이때 선험성은 감관과 오성에 관계하지만 그 자체는 별개로 존재한다. 즉 그것은 인식 기관과 인식을 떠나서도 그것을 분별하는 성질로서 변화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자유의지의 경우 가능성 그 자체는 자유이고 자유의지는 그 실현 능력이다. 따라서 자유의지의 실현인 실재는 변화하나 실현 능력인 자유의지의 가능성 자체는 소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류가 어떤 유토피아를 건설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원동력이다. 정신이 존재와 결부될 때 그 활동 영역은 가능성과 실재성이다. 정신이 존재를 파악함으로써 일치할 때 그것은 실재성이 되고, 불일치할 때 그것은 가능성 속에 있다.

 

가능성은 불일치의 영역이며 실재성은 일치의 영역이다. 가능성과 실재성이 초래된 현존재의 장소에서 현존재의 정신성이라는 것은 그 본질적 속성상 실재성, 즉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때 가능성가능성/실재성실재성, 또는 불일치의 일치로의 진행경로가 형성된다.

 

그런데 현존재(가능성/실재성)의 완전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운동관점을 망각한 현존재가 현존재적 완전성을 찾았다고 믿더라도 이러한 완전성은 다만 불일치 속에 있는 것이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무()로 된다. 현존재적 완전성은 몰역사적인 것이다.

 

가능성/실재성 속에 있는 현존재는 일치를 결여하고 있는데, 이 결여가 비극의 본질이다. 가능성이 유()라는 판단도 실재성과의 연관에 의해 가능하다. 가능성이 유일 때 실재성은 늘 과정 중에 있으며, 이때 가능성은 실재성에 대해 우세하다.

 

실재성이 가능성과 동등해지는 것은 가능성이 완전히 드러나 운동 과정이 종결될 때이며, 이때 가능성은 무로 전환된다. 이때 실재성은 완전성을 이루며, 존재하는 완전성, 즉 신이 된다. 이 경우 원인과 결과는 완전히 일치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가 가능성과 실재성을 대립물이자 동시에 동일물로 볼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

 

진아, 즉 진정한 자아를 가능성이라 하고, 현재의 자아를 실재성이라 하면, 양자는 공히 ' 라는 통일체 속에 내재되어 있는 대립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체로서의 '라는 것은 바로 고향을 가졌던 자, 그러 나 고향을 상실하고 있는 자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성과 그 가능 성의 구현인 실재성을 하나로 보면서 동시에 이 양자를 대립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이 증대해 가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 인식이 더욱 더 증대하여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우리는 보지 못한다. 나의 인식이 이렇게 증대할 때 그것을 통해 신이 가진 것으로 상정되는 완전성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할 이유도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러한 완전성에 이르는 잠재력이 이미 나에게 내포되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완전성의 이념을 추구하기에 충분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또 인식이 증대해 간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인식은 그렇게 증대해 가는 과정에서 그 전제인 가능성을 회복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으로 인식은 매 단계에서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가능성을 무로 보았고, 오성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그는 어느 단계에서 인식하지 못한 것을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고 파악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 나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고 이것이 사유의 결과라면, 이 결과의 원인으로 전제되어 있는 가능성이야말로 우리의 궁극 문제다. 이 가능성은 경험적 실재성이 아니기에 경험에서 떠난 순수한 것으로서 정립되어야 하지만 오직 경험에서 실현될 때에만 인식되므로, 가능성과 실재성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성을 경험에 의해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능성을 경험에 의해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면, 이 가능성은 오직 실현 결과와 등가인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경험에 선행하고 경험에 의해 주어지지 않고 단지 경험에 의해 확인될 뿐이다.

 

경험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칸트의 용어를 빌면 아프리오리(a priori)이다. 이 아프리오리는 시간적, 심리적 발생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해석된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의미하는 아프리오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아프리오리와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칸트의 아프리오리는 경험적인 것을 조금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므로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는 보편성을 가진 것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이 아프리오리를 가능성의 한 측면이지 그 자체가 분리되고 독립된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가능성이란 경험적 실재성과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칸트가 도입한 아프리오리한 것도 궁극적으로는 경험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가 아프리오리한 것과 관련짓는 선험적 인식은 경험적 대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문제 삼는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아프리오리한 인식도 경험에서 그 설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뉴스로를말한다 l 뉴스로 주인되기 l뉴스로회원약관  l광고문의 기사제보 : newsroh@gmail.com l제호 : 뉴스로 l발행인 : 延義順 l편집인 : 閔丙玉 l청소년보호책임자 : 閔丙玉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기아50133 l창간일 : 2010.06.05. l미국 : 6 Brookside Trail Monroe NY 11950  한국 :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산두로 210 / 전화 : 031)918-1942
뉴스로 세상의 창을 연다! 칼럼을 읽으면 뉴스가 보인다!
Copyright(c) 2010 www.newsroh.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