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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희, ‘불멸의 남자 현승효’
1974년 경북대 의대 본과2년, 박정희유신독재 철폐운동 주도하다 제명후 강제징집돼 제대 4개월을 남기고 폭염에 완전군장 구보훈련중 사망한 현승효. 그에겐 뼈가 녹고 피가 말라도 식지않는 불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28개월간 수첩에 빽빽이 적어놓은 그립고 애달픈 연인의 사연들, 30년만에 빛을 본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를 뉴스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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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회향학적 원리(11)

‘유이자 무’
글쓴이 : 현승효 날짜 : 2023-05-19 (금) 15:33:48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회향적 존재와 불일치를 심화하는 현존재적 완전성의 투쟁사다. 우리의 적들이 즐겨 쓰는 유일이니 단일이니 이것만이니 하는 용어들도 그들이 자처하는 현존재적 완전성의 징표들이다. 인간이 마치 방관하는 신의 입장과 같이 현재적 전체, 현존재적 완전성

속에 주저앉아 있을 때에는 안주의 대가로 전체상의 전망이 주는 현재의 의의 자체마저 잃어버린다.

 

전체적 발전과정에서 현대가 무엇이고,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것은 현재의 전체화가 아니라 전체에 대한 현재적 전망이다. 왜냐하면 현존재적 완전성으로서의 현재의 전체화에서는 모든 것이 결정된 예정 속에서 침묵의 수행과 경과가 있을 뿐이지 진보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를 전체화하지 않고 전체의 전망을 가질 때에만 전체는 진실로 우리의 것이 된다. 이때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과제에 의해 비록 현재에 제한되고 있지만, 그것은 전체와의 관련 하에서 수행되므로 나는 전체에 속하게 된다.

 

유이자 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완전한 자유의 영역, 일체의 불일치와 모순이 해소된 영역, 발전의 궁극적 도달점이자 그 자체로서 완전성을 이룬 어떤 실체, 즉 통일장이다.

 

통일장이 비시간적이고 비공간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영혼불멸성을 요청한 칸트의 견해는 옳다. 그러나 우리는 이 통일장의 영역이 어디에 있는지 어떠한 내용을 지닌 것인지는 알 수 없고, 그 실존을 느낄 뿐이다. 그래도 인간이 인간이라면 그리고 그에 다가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면 우리는 투쟁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고 또 그 속에서 우리의 모든 지혜를 동원해 미로를 헤쳐가지 않을 수 없다. 자유는 자족이며, 완전한 자유에서만 투쟁은 종식된다.

 

, 사랑, 명예 등은 왜 자족(自足)의 지경이 되지 않는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 무엇의 획득은 왜 완전 자족에 이르지 못하는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 무엇의 획득은 왜 완전 자족에 이르지 못하는가? 그것이 아직 완전한 통일장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순수한 원인인 주관적 원인과 이질적인 객관적 결과이기에 주객의 불일치를 내포하여 아직 완전한 모순의 해소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시간과 공간에 근거해 사고하는 인간의 속성을 감안할 때, 시공속의 운동은 그 모순을 결코 해소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운동을 생각할 때 그 완결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 이성에 본유적인 사고양식이다. 운동이 완전히 해소된 상태는 더 이상의 모순을 용납하지 않는 상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자족 상태, 완전한 자유의 영역이다. 투쟁과 운동의 완결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간행위의 본질적 양식이 발전적이기 때문이다. 행위의 완전한 상태를 전제하지 않으면 현상 차원에서 발전의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다. 현실 속의 인간은 자유의 현상체이며 투쟁의 실체이므로, 잃어버린 고향을 상정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개별 현상을 통해 인과의 법칙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장 일반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연역해가는 서술 방법과 역으로 구체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소급해 가는 탐구의 방법은 하나의 순환으로 동일한 것이다. 일반적인 것의 제시는 일종의 가설과 같은 것으로서 구체적인 것에 의해 증명되고, 동시에 구체적 제 사실은 이 일반적인 것에 의하여 설명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 그 결과가 연역되는 원인은 그 결과를 증명하기보다 설명하는 역할을 하며, 오히려 반대로 결과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상적 결과를 구체적 전제에 의해 증명하고, 구체적 전제를 추상적 결과에 의해 설명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신 증명이 그 예다. 그는 인간이 신이라는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완전성의 개념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존재는 불일치의 운동 속에서만 확인된다. 운동을 존재론적으로 고찰할 때 그것은 무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존재 또는 유의 진행경로는 무의 끊임없는 잠식에 의한 불일치의 일치로의 경로, 운동의 정지로의 진행이다. 무 또는 불일치는 과정의 중간부분, 소멸 속의 가능성인 유이자 무의 자기 부정 형태이며, 현존재는 무와 이에 대한 부정의 상관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인간만이 반성을 통해 가능성과 완전성의 중간자로서 자기의 현존재를 인식한다. 인간의 현존재가 자기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무를 배경으로 하여 그 비극성을 인지함으로써 가능하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데에는 죽음을 상정하고 삶을 볼 필요가 있다.

 

현존재와 죽음의 상관관계에서 그는 삶의 목적성 또는 완전성을 보고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목적을 감지한 현존재는 자신의 삶의 경로들을 놓고 선택하게 된다. 자신의 가치를 위한 이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적 현존재가 된다. 이러한 것은 현존재로서 근본적 존재에 도달할 목적을 가진 인간이 현존재적 자신에 대해 반성한 결과다. 여하튼 존재 확인은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존재가 다만 운동 과정 속에서 확인되는 데 반하여 인간은 무를 상정함으로써 자기존재를 확인한다. 이것이 타 존재와 인간적 현존재의 근본적 차이점이다. 인간은 이 무에 의해 중간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고 회향적 존재가 된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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