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기분 좋은 마음으로 다음 단계인 하원 교육위 소위원회를 준비하던 필자에게 팀 휴고 하원 의원이 전화를 했다. 휴고 의원은 “피터! 어제 주미 일본대사가 리치먼드로 내려와 주지사를 비롯해 상원 의장과 하원 의장을 만나서 동해 병기 법안을 좌절(挫折)시켜 달라며 강력하게 요청했는데 대한민국 대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주 의회 분위기를 살펴보니 한국 대사도 리치먼드로 내려와 주지사와 하원 의장을 만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동해 법안을 지지하는 하원 의원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피터 김이 한국 대사님에게 연락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자세로 “팀! 지금 이 순간에 대한민국 대사가 리치먼드로 가면 괜히 동해 병기 문제가 국제적이고 외교적인 문제로 부각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동해 법안 통과에 도움보다는 해가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하고 물어봤다. 그러자 휴고 의원은 “한국 대사가 일본 대사보다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면 피터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본 대사가 리치먼드에 왔다 갔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한국 대사가 안 온다면 오히려 조금 모양새가 이상하게 될 것 같습니다. 특히 공화당 의원들의 입장에서는 한인들의 표를 많이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대사가 다녀가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지금 한국 대사가 주지사에게 연락해도 당장은 만날 수 없겠지만 지금부터 약속을 잡으면 나중에 하원에서 동해 법안 심의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시기에 주지사와 하원의장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필자는 “알았습니다. 제가 한국 대사님에게 연락을 해보도록 하지요”하고 전화를 끊었다.
필자는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팀 휴고 의원과 공화당 의원들이 한인들의 표를 의식하기 때문에 한국 대사가 리치먼드에 오기를 바라고 있는 상황이었다. 필자의 걱정은 한국 대사가 리치먼드에 내려감으로써 동해 병기 법안 통과에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원을 장악(掌握)하고 있는 공화당의 원내대표인 팀 휴고 의원이 한국 대사가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하니 그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며칠 후에는 하원 교육위 소위원회가 동해 법안을 심의하도록 일정이 잡혀 있었다.
밤새 고민을 하다가 그 다음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강도호 총영사에게 전화를 했다. 일본 대사가 리치먼드에 와서 주지사와 상하원 의장을 만났다는 사실은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 대사와 총영사도 알고 있었다. 필자는 “총영사님! 아무래도 안호영 대사님이 리치먼드로 내려가 주지사와 하원 의장을 만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총영사는 “그렇습니까? 안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대사관내에서 긴밀하게 논의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생각에 대사님이 내려가시면 동해 병기 법안 통과에 도움이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필자는 “글쎄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대사님이 안 가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 팀 휴고 의원과 공화당 의원들의 의견이 대사님이 내려오시는게 더 좋을듯 하다고 하니 이 사람들의 부탁을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다음주에 하원에서 동해 병기 법안 심의가 시작되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총영사는 “알았습니다. 제가 대사님과 한번 논의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대사님이 주지사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겠습니까? 동해 병기 법안 통과를 지지해 달라고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필자는 “그건 조금 더 생각을 해보시기로 하지요. 일단은 대사님께 말씀드려 주지사와 면담 일정부터 잡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테리 맥컬리프 주지사
전화를 끊고나서 필자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한국 대사가 주지사를 만나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미 세계 경제대국인 일본 대사가 주지사를 만나 설득을 시켜서 주지사가 변심해 있는데 무슨 말을 해야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필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테리 매컬리프 주지사는 정치적인 이력보다는 사업가로서의 이력이 훨씬 길었다. 다시 말하면 전문 정치인이라기 보다 사업가에 가까운, 정치에는 조금 미숙한 주지사였다. 어쩌면 그래서 경제대국인 일본의 요구에 쉽게 설득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주지사로서 버지니아주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면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투자도 최대한 많이 유치(誘致)해야만 하는 위치에 서있었다.
그날 오후 총영사가 다시 필자에게 전화를 했다. “회장님! 대사님이 주지사를 만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주지사 사무실에 연락해서 면담 일시를 잡고 있는데 주지사 일정이 너무 바빠서 지금 당장은 안 될 것 같고 한 일주일 정도 후가 될 것 같습니다.” 필자는 “네! 잘 됐습니다. 일주일 후면 하원 교육위 대위원회에서 동해 법안 심의가 이뤄지고 있을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원 전체 회의가 열릴 것이니 시기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총영사는 “지금 대사관에서 계속해서 논의를 하고는 있지만 회장님 생각에 대사님이 주지사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하고 다시 물어왔다.
필자는 “제 생각에는 대사님이 주지사를 만나서 동해 병기 법안에 대한 언급을 전혀 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저 만나셔서 주지사의 취임을 축하해주고 한국으로 공식 초청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한국의 IT 산업과 인터넷 인프라를 주지사에게 보여드리고 싶다고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대사님이 내려 가시면 법안에 대한 언급을 안해도 주지사는 대사님이 왜 내려오셨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지사는 여러 사업에 무척 관심이 있는 사람이니 한국의 산업시설에 대해서 관심이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원 의장을 만났을 때에는 하원 공화당 의원들이 동해 법안을 지지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시고 법안이 하원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해서 조금 더 힘을 써달라는 부탁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2014년 1 월 30 일, 대한민국 대사가 버지니아 주지사와 하원 의장을 버지니아주의 수도 리치먼드에서 만나게 되었다. 한국 대사가 주지사와 무슨 대화를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주지사가 대사를 만난 후에도 계속해서 동해 병기 법안을 폐기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과 수단을 동원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사가 하원 의장을 만났던 것은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왜냐하면 하원 의장이 대사를 만난 후 계속해서 동해 병기 법안을 전폭 지지해 주었고 결국 하원을 통과시켜 주지사 사무실로 법안을 넘겼기 때문이다. 물론 대사가 하원의장을 만났기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하원 의장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동해 병기 법안은 하원을 무사히 통과했을 것이다. 버지니아주 15 만 한인들의 유권자 파워가 동해 법안 통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어쨌거나 매컬리프 주지사는 외교적으로는 대한민국 대사 대신 일본 대사의 손을 들어준 듯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버지니아 주민들과 한인들의 보이지 않는 압박, 주류 언론사의 노골적인 압박에 항복을 선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당시에는 모르고 나중에 알아낸 사실이지만 상원 전체 회의 하루 전날인 2104년 1월 22일 한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미 국무부 정례 브리핑이 있었다. 동해와 일본해에 대한 국무부 공식 입장을 물어본 일본 특파원의 질문에 마리 하프 부대변인은 “미국 정부는 일본해 단독 표기를 인정한다”고 답변했다. 그 다음날 버지니아주 상원 전체 회의에서 동해 병기 법안 심의 및 표결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하루 전 국무부가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준 것은 명백히 국무부가 개입된 방해 공작이었다. 일본 정부의 로비에 설득된 미 연방정부가 지방정부에서 법안 심의를 하는 버지니아주 40명의 상원 의원들에게 보이지 않는 간접적인 압박을 가한 것이다. 연방정부의 공식 입장이 일본해 단독 표기를 인정하고 있으니 지방정부인 버지니아 주 의회 상원에서는 동해 병기 법안을 부결시키라는 뜻이었다. 테리 메컬리프 주지사의 노골적인 방해 공작에 이어 이제는 국무부까지 일본 정부의 편을 들어 힘없는 버지니아주 한인 민초들을 몰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