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이가 뉴욕에 왔다. 20일 손아래 여동생 이계양가족 5명이 오빠의 나라 미국구경을 왔다. 금의환향만큼 반가운 동생의 미국여행이다.
우리 아버지(이봉헌)와 어머니(이은혜)는 7남매를 낳아서 7남매를 고스란히 키우셨다. 글갱이 마을에서 낳은 대로 모두 기른 집은 우리 집뿐이다.
“자네 집은 야구로 말하면 올 세이프(safe)야. 주자가 모두 살아난 올 세이프란 말일세”
야구 좋아하는 친구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얼른 정정해준다.
“올 세이프가 아니라 퍼팩트게임이지. 9회 말 끝날 때가지 안타 하나 주지 않고 포볼도 없이 완봉승을 거둔 퍼팩트 게임이야. 여태껏 한사람도 죽지 않고 7남매들이 지금도 모두 살아있으니까”
위로 79세 된 누님부터 막내가 61세다. 아버지께서는 86세로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살아계셔서 금년 100세. 우리 7남매 나이와 어머니연세를 합치면 년년세세 600년! 조선왕조 500년보다 찬란한 가문이다.
임금을 모신 좌우정승 이름처럼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남매들의 이름을 적어본다.
‘어머니 이은혜권사 장녀 이계화권사 장남 이계승장로 2남 이계선목사 2녀 이계양권사 3남 이계응 3녀 이계낭 4남 이계완’
그런데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름은 손아래 동생 계양이다.
계양이는 우리집의 미운오리새끼였다. 세살때 천연두(天然痘)를 심하게 앓아서 얼굴이 얽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 학교를 그만뒀다. 애들이 “꼼보딱지 곰보딱지”하고 놀려댔기 때문이다. 어린것이 얼마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으면 자퇴까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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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밖에 모르는 부모님은 동생의 어린상처를 어루만져 줄수 없었다. 동생은 자살연습을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다. 서울에서 야간고교를 다니는 나는 동생에게 전도 편지를 보냈다. 방학이 되어 내려와 보니 동생은 내게 이상한 찬송을 불러줬다.
“믿는 사람들은 굼뱅이 같으니/ 앞에 가신 쥐를 따라 갑시다”
내가 깜짝 놀라 물어봤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오빠 편지받고 수요일 밤 동네에 있는 글갱이교회에 가봤어. 시골할머니 열댓명이 모여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를 부르고 있더라구. 얼마나 맥 빠지게 부르는지 내 귀에는 ’믿는 사람들은 굼뱅이 같으니/ 앞에 가신 쥐를 따라 갑시다’로 들리는 거야. 그런 한심한 교회 다녀봤자 뻔하지“
그래서 한번 나가보고 그만뒀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이 애가 보통애가 아니라 비범한 통찰력이 있구나‘
내가 후에 “글갱이 사람들“이라는 단편소설을 써서 등단(登壇)한 적이 있다. 작품 속에 동생이 작사(?)한 그 ‘굼벵이와 쥐’의 노랫말을 집어넣었다. 심사위원 김소엽시인은 13년이 지났는데도 심사하다가 읽은 그 구절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재미있으면서도 눈물 날 정도로 폐부를 찌르는 데가 있어 심사하다말고 깔깔대며 웃었어요”
‘굼벵이와 쥐’는 동생의 오리지널이다. 읽었거나 누구에게서 들은 인용이 아니다.
방학 중 수요일 밤 내가 어른예배 설교를 하게 됐다. 계양이가 단짝친구 미자를 데리고 구경 왔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미자는 가난한 머슴의 딸이었다.
고3학생이 한 설교제목 “누구의 죄입니까?”(요9:1-7)
“예수님 이사람이 나면서 소경된 게 누구의 죄입니까? 본인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난 동생의 불행을 생각하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께서 동생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 주실수는 없습니까? 그날 이후부터 동생과 미자는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새벽기도로는 모자라 밤기도까지 했다. 깜깜한 밤에 혼자 기도하면 강단위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에서 검은 물체가 성큼성큼 다가와 목을 조르기도 했다. 그래도 견뎌냈다.
어느 날밤 기도를 끝내고 돌아오는데 우리 집 뒤 쓰레기구덩이에서 불이 타고 있었다. 속은 뻘건데 겉은 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모세의 가시떨기 불처럼 성령의 불을 체험한 것이다. 동생은 눈에 불을 키고 책을 읽었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영어책 말고는 모두 읽었다. 수백권이 넘었다. 800페이지짜리 루소의 교육론은 난해했다. 대학생인 나도 몇 페이지 읽다가 집어치워버렸다. 그런데 동생은 그것도 독파(讀破)해버렸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데 고등학교 나온 청년보다도 잘했다. 친구 미자도 마찬가지였다.
신학생이 된 나는 부모를 졸라서 동생을 서울로 데리고 올라왔다. 곰보성형수술을 해준 것이다. 늦은 나이에 시골 양교리로 시집갔다. 집이 너무 작아서 장롱이 들어 갈수가 없었다. 밤낮을 열심히 일했다. 겨울에는 가마니를 짜고 솔방울을 따다 팔았다.
시집 올때는 동네에서 가장 작은 집이었는데 15년 후에 크고 멋진 양옥을 지었다. 농사를 가장 크게 짓는 동네부자가 됐다. 신기하게도 동생부부는 마이더스의 손이었다. 손대는 일마다 저절로 풀려나갔다. 특수농작물로 수익을 올렸다. 한국최초로 불르베리를 심었는데 해마다 수천만원을 벌었다.
삼남매를 뒀다. 큰아들은 연세대상대를 졸업하고 현대그룹에 입사했다. 90년대 중반 평택시골에서는 아주 힘든 일이다. 고시에 합격하여 지금은 노무사로 일한다. 둘째는 자동차정비사로 셋째인 딸은 간호사로 일한다. 이번에 삼남매가 돈을 모아 부모님의 미국여행을 주선한 것이다.
동생 이계양이와 남편 이재익, 딸 이희정 그리고 초등학교 다니는 희정이의 두 아들 이렇게 5명이 왔다. 글갱이의 미운오리새끼가 화려한 백조가 되어 돌섬을 찾아온 것이다. 동생가족을 위해 관광일정을 짜 놨다.
나이아가라 관광여행은 큰딸 진명이가 예매했다. 워싱턴DC여행은 아들 해범이가 인솔하고. 브로드웨이뮤지컬과 맨해튼관광은 둘째딸 은범이가 안내 할것이다. 우리부부는 동생네 식구를 데리고 후러싱으로 가서 가라오케 노래방을 찾아야겠다. 동생 계양이와 고향의 노래를 부르고 싶기 때문이다.
“뒷동산 아지랑이 할미꽃 피면/ 꽃댕기 매고 놀던 옛친구 생각난다/ 그시절 그리워 동산에 올라보면/ 놀던 바위 외롭고 흰 구름만 흘러간다/ 모두다 어디갔나 모두다 어디갔나/ 나 홀로 여기 서서 지난날을 그리네”
동생이 오니까 둘째딸 은범이가 제일 좋아한다.
“아빠 양교리 고모옆에 앉아있으면 이상하게 편안해요. 아무 말씀 안하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큰 산에 기대고 있는 바위처럼 편하고 든든해요. 왜 그럴까요?”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10:51:03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