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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촌 이계선목사(6285959@hanmail.net). 광야신인문학상 단편소설로 등단. 은퇴후 뉴욕 Far Rockaway에서 ‘돌섬통신’을 쓰며 소일. 저서 ‘멀고먼 알라바마’외 다수. ‘등촌의 사랑방이야기’는 고담준론(高談浚論)이 아닙니다. 칠십 노인이 된 등촌이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로변잡담(爐邊雜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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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자유와 크리스찬의 자유

글쓴이 : 이계선 날짜 : 2012-06-15 (금) 00:38:58

김상일교수는 지난번에 “아들 딸들아 차라리 종북이 되라“는 글을 썼습니다. 이번에는 남한의 자유보다 북한의 노예(복종)가 더 행복하다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김일성 찬양가처럼 들렸습니다.

북한은 백두산정기를 동원하여 김일성우상화를 완성시켰습니다. 김상일교수는 한수 더 떠 璇璣玉衡(선기옥형)이라는 설화시대의 妄言鏡(?망언경)으로 북두칠성 북극성을 관찰하여 종북의 위치를 밝히고 있네요. 望遠鏡(망원경)으로 천문을 관찰하는 갈리레오의 방법은 外的觀察(외적관찰)이랍니다. 수박 겉핥기식이라는 거지요. 어둠속에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선기옥형으로 관찰하는 內的觀察(내적관찰)이 진짜관찰이라는 겁니다. 그럴까요?

우물안개구리는 제대로 우물을 관찰하기 힘들지요. 관찰은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살펴야 가능합니다. 갈릴레오의 천문관찰로 인류는 하늘에 인공위성을 띄우고 밝고 아름다운 우주과학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기옥형을 주장하는 황당무계족들은 지금도 무지와 미신에서 벗어나지를 못한채 독재의 밤에 갇혀지내고 있습니다. 김교수는 복종과 자유를 장광설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로 만해 한용운의 시 “복종“을 인용 했더라구요.


 

복종(服從)

남들은 자유를 사랑 한다지 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복종"은 일본치하에서 자유를 누리느니 목숨 바쳐 독립투쟁에 복종하겠다는 만해의 장렬한 애국시 입니다. 그런데 김교수는 이를 남한에서 자유를 누리느니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 주체사상에 복종하는 게 낫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요. 만해와 독립운동을 모욕하는 짓이지요.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건 김교수는 자유와 복종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김상일교수를 한신대교수로 알고 있습니다. 한신대교수라면 굳이 신학교수가 아니더라도 상식적인 신학사상은 알고 있는 걸로 생각합니다.

김일성 사상도 그토록 잘 아는데 크리스찬의 기본사상을 모를 리가 없다고 봅니다. 자유와 복종개념은 크리스찬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지요. 마르틴루터의 종교개혁정신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크리스찬의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루터는 위의 성경구절에서 두 가지 명제를 끄집어냈습니다.

첫째 명제 모든 크리스찬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절대 자유자이다.

둘째 명제 모든 크리스찬은 누구에게나 예속된 절대 노예이다.

자유자는 해방과 구속을 체험한 자입니다. 신앙적으로는 중생한 크리스찬을 말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유 민주국가시민을 말할 수 있겠지요. 절대자유자는 이 기쁨과 축복을 이웃과 나눕니다. 헌신과 봉사로 섬기는 자세로 나누지요.

이를 참 자유 내적 자유 크리스찬의 자유라 합니다. 거지로 살다간 성 프란시스의 생애가 그런 내적 자유를 누린 삶이겠지요. 세계제일의 부를 갖고 있으면서도 헌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재산의 대부분을 구제로 내놓은 빌 게이츠도 참 자유자라고 봅니다.

자유를 체험하고 자유를 누리는 자만이 복종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건 북한처럼 억지로 하는 복종이 아닙니다. 만해처럼 조국해방운동에 투신하는 복종도 아닙니다.

지옥처럼 가난한 노예국가 북한은 지금 남한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시급합니다. 북한동포들은 만해가 독립운동 하듯 자유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남한동포들은 겸손과 봉사로 자신을 낮춰 북한을 돕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될 때 남과 북은 하나로 만나 참 자유 통일한국이 되겠지요.

다음은 김상일 전한신대학교 교수의 글입니다.

 

* 만해시 ‘복종’의 미학과 종북의 미적가치

                                                    -김상일 전 한신대교수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자락에서 ‘북을 따른다,’ 즉 ‘종북’ 이란 말이 워낙 커서 하늘나라에 까지 들리게 되자 천구에서는 세 개의 별들이 서로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우겨대는 말다툼이 벌어졌다.

우리가 사는 지구의 하늘에는 사실상 세 개의 북쪽이 있다. 그 하나는 지구의 자전축이 가리키는 북이다. 이것에 해당하는 북이 바로 ‘북극성 pedlaries'에 해당하는 별이다. 거의 수 천년 동안 변하지 않고 한자리에 북백이 같은 별로서 밤에 길을 잃었을 때나 긴 항해를 하는 항해사들에게 둘도 없이 주요한 오직 북쪽만을 가리키는 별이다. 하늘의 이정표와 같고 실로 사막이나 바다의 여행자들의 방향에 종북하지 않으면 미아가 되고 만다.

지구에는 또 다른 북쪽이 있다. 그것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북쪽이다. 다시 말해서 나침반의 바늘은 항상 일정한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는 데 그 방향이 바로 북이다. 그런데 이 북은 캐나다 어느 호수 부근 땅 밑에 있는 자석에 끌려서 항상 나침반의 바늘이 그 곳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지도가 가리키는 북은 이 두 개의 것과는 또 다른 북을 가리킨다. 지도상의 북쪽이라 하여 이를 ‘도북圖北’ 이라고 하면 위에서 말한 두 개의 북은 ‘자북磁北,’ 그리고 ‘북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물 가운데 보물인 혼천의 혹은 선기옥형璇璣玉衡 이라는 천문 관측 도구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4번 째 별인 문곡성 文曲星 사이의 각도를 측정해 1년 4시절과 1일 24시의 시간과 시각을 분과 계절별로 시간을 측정한다.

선기옥형에 의하면 문곡성은 북두칠성 가운데 하나이지만 이 별은 지구의 정중앙과 정렬돼 있어서 관찰자가 주관적으로 자기 입장에서 각도를 측정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갈릴레오의 망원경과 같이 인간이라는 주체가 천체라는 객체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선기옥형은 인간이란 관찰자의 주관에 따라서 하늘의 북과 지구의 북을 조절 관찰한다. 그래서 실로 선기옥형은 사람중심적 홍익인간 사상이 반영돼 있다.

그 무엇 보다 주요한 것은 하늘에 있는 북이라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고 땅에 있는 북과 남극을 상대적으로 일치시키는 것이 천문관측의 필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의 남과 북극 의 중앙에 인간이 있고 이를 ‘중극’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최근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종북’ 논쟁은 안타까운 면이 있다. 마치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드려다 보면서 어느 것이 북이고 어느 것이 남인가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태도이다. 만약에 북과 남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관찰하려 한다면 북은 하나뿐일 것이고 진리는 하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마녀 사냥의 논리가 나온다. 이것은 전형적인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갈릴레오의 관찰 태도를 ‘외재적 관찰 ex-observation’이라고 한다면, 선기옥형의 그것은 ‘내-외재적 관찰 in-ex-observati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유와 복종을 이 두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것으로 관찰할 것인가? 선기옥형으로 한 번 관찰해 보자. 지금 조중동과 새누리당은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 북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 고유한 사유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선기옥형 식의 ‘사람 중심적’ 발상을 한다면 하늘에도 여러 개의 북을 둘 수 있고, 그것에 일대일도 대응하는 남과 북을 지구에도 두고서 이를 조절하는 식으로 관찰을 한다면 상대를 이해하고 자기의 주장을 상대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유’와 ‘복종’이라는 말도 좀 넉넉한 공간을 두고 이해될 수 있다. 남에 복종하는 것은 자유이고 북에 복종하는 것은 인권유린이라는 식의 사고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이 무한 발전하는 현대사회에 걸맞지 않는 방식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 지침이 ‘선진화’이다. 과연 이런 이분법적 사고와 철학을 가지고 선진화 길로 나갈 수 있을까.

진보 진영 마찬가지이다. 이분법적 사고라는 관점에서 보면 진보가 보수보다 더 경직돼 있고 한 술 더 뜨고 있다. ‘종북’ 운운 발언이 이승만 때에도 없었고 박정희 유신 시대 때에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 1990년 대 말 사회당이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은 실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자유와 복종은 실로 대상에 따라서 상대적이다. 만해 한용운의 시 가운데는 만해답지 않은 시가 한 수 있다. 그것은 ‘복종’이라는 시이다. 가장 자유인으로 살은, 그래서 일제시대에 공민증도 없이 살았던 만해가 복종을 찬미하는 시가 있다는 것이다.

복종(服從)

남들은 자유를 사랑 한다지 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도대체 만해가 이 시에서 말하려고 하는 시어는 무엇인가? 만해의 ‘복종’을 이해하려면 그가 옥중에서 쓴 ‘조선독립의 이유서’를 읽어야 한다.

읽어야 할 이유는 두 글에서 복종과 자유의 개념이 보기에 따라서 상반되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이 같은 말을 두고 이렇게 다르게 말 할 수 있느냐고 할 정도로 다르다.

'조선독립의 이유서' 서문에서 만해는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는 마치 남한 보수와 탈북자들이 말하는 자유와 같아 보인다. 즉, 이어서 만해는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터럭처럼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고 한다.

그러면 만해가 지금 살아 있다면 보수주의 편이 되고 탈북자 지원 단체에 가입하고는 종북주의자들을 맹비난 하고 나설 것인가?

아니다. 그의 시 ‘복종’은 전혀 다른 자유과 복종을 말하고 있다. 즉, “남들은 자유를 사랑 한다지 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라고.

만해 한용운의 삶을 일관하던 좌우명이 표출된 시이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논리에 영합하여 누릴 수도 있는 '이름 좋은 자유' 보다는 님(조국)이 내게 준 '지상 명령 (진리에의 정진, 민족의 해방)'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길을 선택한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서, 이 같은 본성은 남이 꺽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심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을 것이다." (조선 독립 이유서)

나는 임의 그림자요, 임의 일부분이며, 임은 내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임에게 속박되는 것은 기쁨이며 행복이다. 허울 좋은 자유를 앞세워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는 것은 민족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임에게의 복종은 거짓된 현실 속에서 자기를 회복하고 보다 진정한 자유를 실현함을 의미한다.

"인간 생활의 목적은 참된 자유에 있는 것으로서, 자유가 없는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으며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아까워할 것이 없으니, 곧 생명을 바쳐도 좋을 것이다." (조선 독립 이유서)

다시 말해서 '복종'에서 말하는 '자유'는 만해가 감옥에서 쓴 <조선 독립 이유서>에서 밝힌 '참된 자유'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참된 자유'는 식민주의자들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간 생활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 일시적으로 현실과 타협하여 얻어낸 '이름 좋은 자유'는 자기를 속이고 민족의 미래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 해방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만해는 '이름 좋은 자유'를 거부하고 '참다운 자유'를 얻기 위해 복종의 길을 걷겠다고 한다. 즉 '지각없는 사람들은 민족을 등지고 현실에 순응함으로써 얻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더 큰 자유(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 조국의 소명에 복종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유가 좋은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이름 좋은 자유'는 내가 바라는 진정한 자유가 아닌 까닭에 복종의 길을 택하겠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할 때 복종하고 싶은 대상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뿌듯한 행복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연은 '참된 자유'를 향해 가는 길(복종)에서 마주치게 될 위협을 전제한다. 내가 복종하고 싶은 대상은 오직 당신뿐이지 그 이외의 어떤 것도 내게 복종을 강요하거나 '당신'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 다른 대상에게 복종하려면 먼저 당신에게 대한 배신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핵심은 일상의 어법이나 관념과는 전혀 상반된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 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라는 첫 행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다. 그것은 화자가 '복종'하고자 하는 대상인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이 시에서 '당신'은 곧 한용운 시가 보여 주는 열렬한 구도와 절대적 사랑의 대상, 즉 '님'이다. 이렇게 보면 이 시에서의 '복종'은 곧 절대적 진리 또는 종교적 절대자(신)에 대한 복종인 동시에 조국에 대한 복종이며, 그러한 복종은 곧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자유라는 역설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 시에서의 '복종'은 타율적인 강요에 의한 굴종(屈從)이나 속박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복종이다. 그것은 사랑을 위한 희생이며, 헌신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서의 복종은 막연한 자유보다 오히려 더 큰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유와 복종은 결코 망원경으로 투시하여 나올 결과물이 아니다. 자기의 처한 입장과 삶의 목적 그리고 국가관에 따라서 상대적이다. 마치 선기옥형으로 천체를 관찰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우리는 남한의 시각에서 북의 자유와 복종을 말해서는 안 된다. 조선에는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에 지도자와 인민 대중 간에 형성된 자유와 복종 개념이 있다.

북에서 애창곡 가운데 하나인 ‘동지애의 노래’ 가사 가운데 “천금을 주고 살 수 없는 동지의 한없는 사랑, 다진 맹세 변치 말자 한별을 우러러 보네. 죽어도 잃지 않는 생, 그 사랑 주신 거라네” 여기서 한별과 동지란 김일성 주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조선의 주민들에게 김일성 주석은 그들의 ‘님’이다. 님은 생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이다. 만해는 이런 님에게는 복종하는 것이 자유라고 한다. 반면에 생과 사랑을 빼앗아 가는 자에게는 자유를 위해 불복종하고 생이 다하도록 싸우라고 한다. 그래서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고 한다. 이를 두고 우상화라고? 정말 그런가? 만해도 조국과 민족을 우상화 했나?

만해에게서 자주가 없는 자유는 노예의 자유이다.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누구 인가? 그 사람은 나에게서 자주권을 빼앗는 사람이다. 자주권을 빼앗은 자가 주는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다. 자주권과 주권을 빼앗은 자에게 복종하면 나를 사랑하는 님에게는 복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듯이 우리에게 님은 한 분 뿐이다. 그 님은 나에게 자주권을 주는 님이다. 자주권을 주는 님 앞에서는 나의 자유를 포기하고 복종을 하는 것이, 자주권을 빼앗은 님이 주는 자유보다 더 귀중하다.

지금 남에서 소위 ‘종북’으로 지탄(?) 받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자주권 없는 자유는 차라리 포기하고 자주권을 주는 북에 복종하겠다는 논리가 아닌가 한다.

이렇게 만해의 두 개의 글을 놓고 자유와 복종의 변증법적 관계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 같다.

북의 다른 애창곡 “장군님 찬 눈 길 밟지 마시라" 노래말에 “우리를 잘 살게 하여 주시려 오늘도 눈 내리는 길을 떠나시렵니까. 우리가 대신 다 밟으리니, 장군님 장군님 이 아침 찬 눈길 밟지 마시라”가 있다.

이 노래가 만해의 시 “복종하고 싶은데(곳에)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와 하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만해의 시를 두고는 '복종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도 일종의 복종의 미학이다. 예수가 '나를 따르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할 때에 예수 자신이 진리의 당체이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와 하나 되는 복종은 미학이라는 것이다.

북녘의 사람들은 수령, 당, 인민을 진리의 당체로 보고 있다. 당과 수령과 인민은 한 몸이고 정치생명공동체이기 때문에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헌법 63조) 있다. 그래서 그 안에서는 복종하는 사람과 복종케 하는 사람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이를 두고 '집단주의 원칙'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미적 가치의 창조'라고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주체의 미적 가치인 것이다. 북의 언론 매체는 "종북도 없고 종남도 없다. 남북은 하나이다. 한몸인데 어디 복종의 주체와 객체를 나누느냐" 연일 방송하고 있다. 조선이 한 수 위인 것 같다.

종북을 아무리 해 보았자 북은 복종하는 사람들을 노예로 삼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1992) 제 8조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사회제도는 근로인민 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으로 되고 있으며 사회의 모든 것이 근로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사람중심의 사회제도이다" 와 같다.

남에서는 아무리 자유를 구가해 보았자 자주권 없는 자유는 짐승이 누리는 자유이고, 북에서는 아무리 복종을 해 보았자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두고 남에서는 종북주의로 몰리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복종하고 싶은데(곳에)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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