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이는 엄마 없는 곳에서 저금통에 있는 동전 쏟아놓기와 세면대 수돗물 왕창 틀어 화장실 한강 만들기를 주특기로 삼는 장난꾸러기 5살박이 제 아들입니다. 장난을 프로로 하는 것은 여느 5살짜리와 다름이 없지만,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또래 친구들과는 다른 에반이는 중증 자폐증(自閉症)을 가지고 있는 발달장애아(發達障碍兒)입니다.
자폐아의 엄마로 살아온 지난 2년 동안 혼자서 열심히 배워온 젤로 중요한 교훈은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더라도 절대 내 속에 자리잡은 "명랑상쾌긍정"의 자아(自我) 친구들을 놓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울면서 캔디처럼 웃으면서 달리자라는 주문을 하루를 시작하기 전 이른 아침에 외워두곤 하지요. 하지만 오늘처럼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지면서 괜시리 가을타는 분위기가 나오면 , 1차부터 3차까지 제 뼈 속에 줄을 선 명랑상쾌긍정이라는 제 자아 친구들은 배신을 하고 잠을 자러 간다고 하네요. 그리고 좀처럼 모습을 보기 힘든 4차 철학자 자아님이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나타나시게 됩니다.
오늘 이 철학자 자아님께서는 저에게 에반이가 자폐라는 것을 안 이후부터 달라진 제 모습을 살펴보거라 하고 목소리를 높이시는군요. 명랑상쾌긍정 자아 친구들과 함께할 때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요. (에반이의 바쁜 학교와 치료시간 때문에 평소에는 해 볼 시간이 없었다는 게 옳겠군요.) 김치 담근 타파통에 끓인 보리차를 식히는 바람에, 아까워서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그렇게 김치향이 강렬하게 나는 보리차를 폼만 우아하게 하고 마시는 오늘같은 날에 보면, 에반이로 인해 엄마로서의 저는 많이 달라져 있더군요.
개구리처럼 쭈글쭈글한 조그만 것이 내 자식이라고 막 태어나서 내 품에 안겨질 때 밀려오던 그 온몸 충만한 따뜻함, 모든 엄마아빠님들 공감하시지요. 그렇게 쭈글거리는 에반이가 피부와 뼈 사이에 통통하게 살을 채워 나가는 순간순간마다 제 마음 속에는 에반이에 대한 꿈이 막지도 못한 속도로 무지막지하게 커가고 있었더랍니다. 요 녀석, 이렇게 발을 쭉 뻗는 것이 완전 축구선수 감이군! 세계를 알리는 축구선수가 되렴! 멋진 손가락으로 피아노도 완전 딱이겠는걸! 젖 먹는 집중력을 보니 세상을 놀라게 할 과학자가 되려나봐! 하다못해, 이빨이 나는 게 여간 범상치 않아. 말 잘하는 변호사가 되려나? 대통령까지도 할 지 누가 알겠어? 암튼 엄마의 꿈은 끝도 없이 뻗어나가고 있었죠.
그런데, 에반이의 자폐 장애를 인정하는 그 무렵, 눈물로도 눈을 밤송이로 만들 수 있다는 생체 체험 딱 하루 하고 나니까, 뭐 더이상 나올 눈물도 없더군요. 그 때도 철학자 자아님께서 슬그머니 나오시더니, 저에게 갑자기 제 신경 마디마디를 꾀어차고 있는 에반에 대한 제 꿈이라는 것이 왜 그런 꿈이어야만 했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저는 에반이가 발이 이렇게 쭉 뻗어지는 걸 보니, 주변에 누가 쓰러지면 뒤로 엎어매고 병원으로 잽싸게 뛰어가겠네, 요런 집중력과 말솜씨로 정말로 네가 행복한 길을 찾아주렴, 하는 그런 꿈을 왜 꾸지 못했을까요. 제 꿈들은 에반이의 내면을 채우는 진실한 바람이 아닌, 남들이 어떻게 이렇게 봐주면 내 위세도 세우고 창피하지고 않겠는 걸 하는 내 욕심이 사실은 참 많았다는 것을, 저는 많이 힘들게 에반이가 두돌이 될 무렵 에반이의 자폐를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이가 장애가 없더라도 다들 책 한권은 써도 된다고 말을 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많이 힘이 듭니다. 하지만, 장애가 없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아빠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꿈들이 아이의 내면을 채우는 꿈이 아닌, 외면에 많이 치중한 그런 꿈이라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 너무나 나중에 오게되지요. 부모로서 아이를 어른으로 다 키워내는 그 순간 자신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엄마아빠님의 꿈과는 다르게 나타날 때, 끝도 없이 밀려오는 허탈함을 감싸안기가 많이 벅차신 듯 합니다.
저는 에반이에게 바라는 것은 정말 스스로 행복할 수 있도록,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행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주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에반이 선생님들께, 우리 에반이 언젠가는 정상아처럼 될 수 있을까요? 물어보는 것을 즈긋하게 오래 전에 그만 둔 이후로, 우리 에반이가 다른 정상아처럼 되는 것은 저의 바람이 더이상 아닙니다. 에반이가 그렇게 소위 정상아처럼 되어 좋아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에반이는 어떻게 자라나던 저의 아이이며, 그렇기에 에반이가 필요한 것을 엄마로서 팔이라도 잘라주어야 한다면 팔이라도 덜컥 잘라주겠노라 하는게 엄마겠지요. 하지만 그 댓가로 에반이가 언젠가 꼭 좋아져서 제가 미루어놓았던 꿈을 이루었으면 하는 것은 이제는 더이상 품지 않습니다.
에반이는 꾸준한 자폐아를 위한 전문교육을 통하여 자신을 조금씩 변화시켜, 언젠가 사회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섞여 행복할 수 있도록 스스로 준비중입니다. 저는 그렇게 열심히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커가는 에반이를 보면서, 저만의 숙제를 시작해 보겠다고 결심헀습니다. 언젠가 제가 에반이 손을 놓아야 할 때가 올 때, 그래서 에반이가 혼자서 살아남아야 할 때, 에반이와 같은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보는 눈이 조금은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사랑협회을 통해 앞으로 써 나갈 제 글들도 사실은 제 큰 숙제 속에 있는 작은 과제거리인 셈입니다.
철학자 자아님은 이제 주무셔도 될 듯 합니다.
저는 다시 명랑상쾌긍정 자아 친구들을 불러모아 앞으로 글로 찾아뵈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 마라토너 에반엄마
"마라토너 에반엄마"님은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사랑캠프 참가와 "민들레 에세이"가 계기가 되어 이렇게 아들 에반이와의 이야기를 풀게 되었습니다. 자폐와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해와 공감이 생겨나길 소원합니다.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분들!!! 언제든지 말 걸어 주세요. 이글은 한국자폐인사랑협회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