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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소년의 섞어찌게 세상
삶의 무게에 머리카락은 반백이 되어 가지만 마음은 언제나 청춘인 중년이 살아가는 복잡하고 요지경 같은 세상의 잡다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삶의 지혜를 찾아보는 코너입니다. 대학원에서 언론을 전공한 익명의 필자는 한국에 거주하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며,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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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의 추억

글쓴이 : 흰머리소년 날짜 : 2011-07-26 (화) 12:30:52


신문 100부면 몇 킬로그램이나 나갈려나?

글쎄....킬로그램씩이나 하겠나?


1988년 올림픽이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고 지나갔다는 그 해 추운 겨울날 오후.

얼굴은 새까맣고 눈은 힘없이 게슴츠레 하게 풀려있는, 늘 입고 다니는 그 까만 바지를 빨지도 않고 한달째 걸치고 다니는 꼬질한 고등학생 녀석이 신문 꾸러미를 들고 행당동 골목을 누비고 있었지요.

집집의 대문마다 교실에서 챙겨 온 분필로 동그라미에 브이자를 그려놓아 그 표시만 보면서

나름대로의 코스를 따라 100집만 돌면 그놈의 하루 일이 끝나는데......

이것이 힘들다면 어디 '88올림픽에 빛나는 대한의 건아'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싱싱한 나이에 잘 먹고 잘 놀았으면 매일밤 잠도 못이루게 힘이 뻗치겠지만 그놈이 그날은 아침도 건너뛰고 점심은 생략하여 뱃속이 영 집 떠난 강아지 기둘리는

보신탕집 주인마냥 허전한 것이.....

홀 겹 면바지에 살을 애이는 겨울바람이 불어 닥치니 걸음도 걷기가

힘들었다 이겁니다.


그렇게 바람이 많이 불어도 목장갑 하나면 손가락은 나름대로 고마울 텐데, 사실 그거 끼고서 신문 뭉치를 들라치면 이리저리 미끄러지고 손가락 놓을 자리도 찾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있어도 못 끼지만 없으니 그 녀석은 아마도 차라리 잘됐다 싶었을 것입니다.

신문 돌리는 길에는 시장통도 있는데 길 언저리에 자리 잡은 가게 집에 쌓여 있는 빵 봉지를 보자 녀석의 눈이 초롱하게 빛나더라구요.


그런데 덴장~~!!

녀석은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져봐도 찾던 것을 못찾은 모양이데요.

그 집 앞을 기웃기웃 하다가는 그냥 지나가길 몇 차례....

오호라....아마도 '삼립'에서 나오는 단팥빵이 먹고 싶은 모양인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있을 턱이 있나요.

아침저녁으로 차비가 없어서 한 시간씩 걸어서 학교에 가는 놈이....

손가락이야 얼어서 팅팅 불어 터지든 말든 허벅지로 칼바람이 불어와 살을 에이든 말든

콧구멍에 콧물이 찔찔거리든 말든 겉으로 보이는 민생고(民生苦)는 참을 수 있을만큼

초 울트라 테크노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엽기적인 놈으로 기억되는데요.

배고픈 민생고는 방법이 없었나 봅니다.


천 원짜리 하나라도 꺼내주고 싶었는데...

저와 녀석은 그런 관계가 아니었지요.


녀석은 아마도 꽤 그것이 먹고 싶고, 그것을 먹으면 힘이 나서 신문을 다 돌리는데 걸림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바보처럼 빵 봉지만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집중력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녀석은 그런 집중력을 공부하는데 썼어야 훗날 성공을 했을 텐데....참 궁금합니다.

아 근디..... 어디선가 솔솔 풍겨오는 맬랑코리한 냄새가 녀석을 코를, 아니 배고픈 위장을

자극(刺戟)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필시 그것은 돼지와 관련되고, 당면과 관련되고, 뚱그런 찜통과 절친한 인연을 맺고 있는

'순대'라는 음식물의 냄새임에 틀림이 없던 것이지요.

 

www.ko.wikipedia.org

저 멀리 시장 통에 녀석을 사로잡는 금빛 후광을 발하는 '아줌마 순대'집 간판이 있다는 것을 녀석의 눈빛을 보고 알았습니다.

녀석은 먹는 것이란 먹는 것에는 무조건 반응하는 음식 레이다같은 흉측 한 놈이었지요.

그렇다고 머리끝에 안테나가 달리지는 않았으니 주변에서도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은

그런 부류(部類)의 녀석입니다.


"나는 너의 냄새만 맡아도 뿅 간다."


그것은 모 배우의 뽕 체험기가 아니었던 것이니.....

그것의 냄새는 천상의 향기요. 그것의 때깔은 총천연색 32비뜨 뚜루컬러로 녀석을 끌어 땡겼죠.

참을 수 없었지만 주머니 사정을 방금 확인하고서 형편을 아는데도 다시 간다면

자조적 가치관을 가진 호모사피엔스로서 얼마나 쪽팔립니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었슴다.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는 녀석에게 저 멀리 아주 모기소리만 하게 들릴 듯 말듯 울려오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이것 봐~~~ 학생~~~!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지금에서 생각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내년이면 50을 바라보는 아줌마 목소리 였는데요.

녀석은 마치 당대 최고의 여가수 정수라의 목소리 들은 듯 고개를 홱~! 돌리데요.

저는 녀석의 조건반사 내공에 흠칫 놀라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지요.

잘못하면 다치거든요.

아마도 녀석이 그런 순발력을 육상에 걸었다면 임춘애 누나처럼 평생 서울우유 못 먹겠습니까.


그 아줌마의 울퉁불퉁한 손에는 이따만한(약 20센치) 순대가 덜렁덜렁 들려 있었습니다.


"학생이 추운데 고생하는 거 같아서....배고프지? 이거 먹고 일해요."


저는 녀석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스페이드 에이스 석 장 깔아놓고 히든에서 포 카드 잡은 친구의 눈빛을 기억 하십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ㅡ ㅡ;


녀석은 아줌마가 건네준 순대를 단숨에 입으로 우겨넣고 있었슴다.

'감사합니다'는 그 사이로 겨우 흘러나오고 있었지요.

새까만 손에 그만큼 새까만 순대를 움켜쥐고 삐져나오는 당면을 엄동설한 찬바람에 흩날리며, 그것도 사람들 우글우글 지나다니는 시장통 중앙에서 말임다.

말릴 틈도 없었슴다. 아니 자제력이 떨어졌습니다.


먹는데 죄 없다고 해도 말임다.

그따우로 추잡하게 먹으면 풍기물란? 죄로 쫌 살아야 한다고 그때 느꼈습니다.

브리지트 바르돈가 먼가...울 나라 영양탕 먹는다고 머라고 한 블란서 액스트라가 봤다면

아마 이성을 잃어서 멱살잡이 했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지 않겠습니까.


물도 안마시고 허겁대며 먹다가 얹혔다고요?

저도 그런줄 알았슴다.

그럼 배고픔에 서러워 그랬다고요? 흠....그럴듯 하지요?


왜 울었는지 나중에 물었습니다.

녀석은 혼자 이렇게 뇌까리더군요.


"젠장. 너무 맛이 있어서 눈물이 나더란 말이야."


녀석은 그 이후로 순대를 무지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 순대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호텔 부페에는 순대가 왜 없는지에 관해서 논문도 쓰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렇슴다.

살면서 나보다 그렇게 나아 보이지도 않는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 오래 살지 못하니.....

작은 인연도 소중한 것이고, 세상에 하찮은 것이 도대체 없더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13년전 그 겨울날 생각이 났습니다.

그 아줌마가 언제 알고 지냈다고 장사 밑천인 순대를 썰어서 주셨겠습니까.

본인도 넉넉치 못하지만 어려운 이웃을 위해 순대를 건네셨던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그리워집니다.

 

www.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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