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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민목사의 신앙칼럼
1991년 총신대학 졸업후 도미, 뉴브런스윅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M.A.) 과정을, 예일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석사(M. Div.) 과정을 전공한 후, 드류대학에서 신학박사(Ph. D.) 과정을 이수하였다. 장로교 신학과 기독교 교육학에서 출발하여, 민중 신학, 여성생태신학, 해방신학, 포스트 콜로니얼 신학을 거쳤고 지금은 동양신학을 연구하며 이민목회와 청소년 목회에 헌신하며 두십자가 신학서당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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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주일날 짜장면 사 먹어서는 안돼!

글쓴이 : 정영민 날짜 : 2011-12-28 (수) 00:24:53

미국에 살면서 한국어를 읽고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얼마간 살다가, 무슨 무슨 연유로 해서 '산넘고 물건너 바다건너서' 이곳 미국 땅에 와 사는 재미동포들일 것이다. 낮선 땅, 미국에 건너온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갑자기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묘한 기분을 느끼며 지낸다.

이유인 즉슨, 한국에서 살아왔던대로 '먹고, 자고, 입고' 살아가려니까 무엇하나 제 힘으로 처리할 수 없어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묻거나 도움을 얻어야 되더라는 것이다. '한국문화'속에 살다가 '미국문화'속에 던져졌으니 다시 어린아이가 된 기분으로 하나하나 겪으며 배울 수 밖에 딴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문화'라는 말은 현대인들의 입에 참 많이 오르내린다. '군사문화'니 '일제문화'니 '대중문화'니 '문화인'이니 '신세대문화'니 하면서 지역별로, 시대별로, 영역별로 구분하여 앞뒤에 말을 붙여 그 무엇을 일컬을 때가 참 많다. 문화, 문화 하지만 정작 ‘문화가 도대체 뭐요’ 라고 물으면 얼른 이거다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문화란 아마도 ‘어린아이가 태어나 그가 태어난 사회의 성실한 한 일원으로 성숙, 성장하여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교육되고 전승되는 그 모든 것들’이라고 말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문화전승의 과정을 또한 우리는 '사회화' 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 사회의 일원인 일개인의 습관, 기호, 성격, 사상까지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문화라는 말은 원래 우리 선조들이 만든 말은 아니고 서구말을 번역한 말이라고 한다. 영어로 culture, 독어로 kultur라고 하는 말은 장구한 인류문화사에 비한다면 불과 100여년 전에 비로소 학술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지 19세기말까지 전문용어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문화 보다는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말이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왔다는데 문명이란 말은 '예의범절을 안다' 는 뜻을 의미 한다는 것이다. 즉 문명인(the civilized)이란 식사예법이나 인사법등을 잘 아는 세련된 사람을 지칭했는데, 전쟁으로 발생된 노예(奴隸)들을 제외한 고대사회의 시민층들을 일컫는 말이었다나.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 잠깐 생각해보면 힘없이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살아가는 경우나 법도, 예절 등이 없었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 않겠는가 싶다. 노예들은 거칠고 예의도 모르는, 세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판단은 노예를 부리는 사람들의 일방적인 판단이지 노예 입장에서 생각하면 사람을 잡아다가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부리는 저들이야말로 천하에 '거친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문화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지 힘 가진자들의 특정한 문화만을 절대적이며 완전한 것이라고 강요할 수 없으며 상호 존중 되어야함이 이치이다. 미국에서 살다보면 우리는 흔히 남의 문화를 자신이 가진 문화의 근거로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무수한 경험들을 하게 되는것 같다.

하루는 한인 유학생이 조그만 학교 기숙사의 공동사용 부엌에서 김치랑 밥을 먹고 있는데 한 미국학생이 짜증난 얼굴로 오더니 밥 먹고있는 뒤에다가 방향제를 칙~ 하고 뿌려버리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동료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부아가 치밀기도 했지만 그저 밥맛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런 '썰렁한' 일을 우리는 '문화충돌'이라 부른다.그 미국학생에겐 불쾌한 냄새가 나면 쭉 그딴 짓을 해왔을테니 불쾌감의 원인인 '이상야리꾸리한' 김치냄시를 제거하려 했으며, 불쌍한 그 친구는 낮설고 니글니글 하기만한 미국음식 대신 오랬만에 군침 팍팍도는 김치하고 밥을 화끈하게 먹어보려 했을 뿐이었을 터인데 말이다.

그러나 문화충돌은 항상 부정적이지만 않다.오히려 문화들이 서로 만나 부딪치고, 섞이고 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거나 발전해온 것이 인류문화사가 아니던가? 아뭏튼 필자로선 더이상 문화에 대해 벌여놓는다는건 지극히 따분한 일일뿐만 아니라 나중에 다 주워 담지도 못할 무모한 일이다.

미국에서 한 사람 한국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의미 I

필자가 관심하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문화는 어떤 의미를 지니며 성서는 이에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가끔 교인들로 부터 기독교인들이 노래방 가도 되느냐는 질문을 들을때가 있다. 이런 질문 배후(背後)에는 누가 뻔질나게 노래방 다니는데 기독교인으로서 응당 잘못된게 아니냐는 자신의 신념에 동의를 구하려는 의도가 있기도 하겠고, 친구들이랑 노래방이라는데 한번 가봤더니 생각보다 그리 몹쓸곳이 아니던데 자기 신앙만 확실하면 상관없는것 아니냐는 질문의도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노래방' 문화라는 유행이 생긴 요즘에 생긴 질문이지만 이전에도 비슷한 질문이 많았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기독교인이 주일날 짜장면 사먹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었다.지금으로 부터 대략 한 세대전 한국의 기독교가 불붙듯 번져갈때 즈음에 어느 교회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일이다.

열심있는 주일학교 전도사가 하루 온종일 여러가지 교회 봉사와 코흘리개 꼬맹이들을 가르치느라 수고한 교사들과 함께 식사겸 교사회의차 중국집에 모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교회 주일학교 부장 장로님께서 대단히 "신실하신"분 이셨는데 이 분이 뒤늦게 이 소식을 들으시고는 옹기종기 앉아서 한참 맛있게 짜장면 먹고있는 중국집에 불현듯 나타나셔서는 그 자리에 모인 교사들과 철없는 전도사를 향해 "절대로 주일날 짜장면 사먹어서는 안돼요"라고 마구 나무라셨다는 것이다.

맛있게 먹던 교사중에 한 사람이 동료 교사에게 이렇게 말하지않았을까? 거봐, 내가 뭐랬어 쨤뽕으로 하자고했쟎아!'

짜장면이 기독교와 대체 무슨 원수가 졌길래!

  

이러한 질문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기독교라는 문화와 노래방, 짜장면의 모습을 한 한국의 문화 사이에서 생긴 긴장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 양자 사이에서 '먹느냐 마느냐', '가느냐 마느냐' 식의 결단을 요구하는 입장은 기독교와 문화를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 (배타주의: exclusivism)이라할 수 있으며 '기독교와 짜장면이 도대체 무슨 원수가 졌느냐'라며 기독교인이 세상 문화속에 살고 세상속에 기독교인도 있는거지라는 식으로 유별난 구분보다는 서로를 동일선상에 두려는 입장 (혼합주의: syncretism)도 있을 수 있다.

배타주의는 기독교와 문화 사이의 양자 택일에 있어서 기독교의 초월적 권위를 존중하면서 그 사회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문화유산은 배격하려 하던 입장인데, 이때 선교지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문화로부터 단절되거나 고립되고 만다. 이는 서구의 기독교가 한국에 선교할때 취해진 입장인데 이로인해 우리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의 훌륭한 점들을 홀대하고 무시한 과오(過誤)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평가를 우리는 쉽게 듣는다.

특히 '이것이냐 저것이냐' 식의 배타주의는 흑백론적이며 이원론적인 사고로 고착되어 잘못된 현실을 변화시키고 개혁 하고자 할때 상당한 역기능으로 작용 한다.혼합주의도 배타주의만큼 부정적으로 평가 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혼합의 과정에서 기독교의 독자성을 약화 시키거나 상실케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전반적인 한국교회 교인들의 '기복적'신앙 양태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한국인의 무속신앙과 성서의 축복관이 부정적으로 혼합되어 나타나는 경향이라 하겠다.

미국에서 한 사람 한국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의미 II

그렇다면 성서는 우리의 신앙과 문화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구약성서에는 신앙과 문화 사이에서 이러한 혼합주의적 유혹과 체험, 그리고 배타주의적 경고와 각성의 양면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성서에 나타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소위 성조(聖祖)들의 생활은 천막에 치고 살다가 다시 가축떼를 이끌고 풀과 물을 따라 여기 저기로 돌아다니는 반유목민의 삶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르단 계곡과 산악지역에서 유랑하던 아브라함과 그의 부족 식구들은 아마도 주전 1200년경 즈음에 반옥한 반월형 곡창지대의 남쪽 끝 부분인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국제 권력의 정치적 공백기를 틈타 일어난 반 유목민족 (에돔, 모압, 암몬족)의 이동의 물결에 휩쓸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고 학자들은 본다.

하지만 가나안은 이미 그곳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정착하여 농경문화를 일구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풍성한 농산물의 수확을 위해 신격화된 자연의 힘을 숭배하고 있었다. 이들이 섬겼던 신의 이름은 우리의 귀에도 익숙한 '바알'(Baal) 이었는데 이 바알은 '주인'(lord) 또는 '소유주'(owner)를 의미하는, 천둥과 비를 내리며 땅의 풍요로운 수확을 관장하는 남성 신 이었다.

고대 가나안인들은 신비스러우리만치 놀라운 토양의 생산력을 경외하였으며 이를 풍산신인 바알과 그의 배우자인 아스다롯(Ashtarts)의 성교(性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이들은 농사의 풍성한 소출에 자신들의 생존과 행복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풍산신을 잘 섬김으로 풍성한 번성을 보장 받으려 하였다.

당시의 가나안 신전에서는 바알제가 빈번히 행해졌는데 이는 바알의 성관계를 종교의식을 통해 재연하려는 제사로서 이때 남자는 바알과, 여자는 아스다롯과 동일시 되어 실제로 신전에서 성창과 성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제의적 성행위를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의 매음문화(賣淫文化)의 관점에서만 매도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은 이와 같은 방식에 따라 풍산의 신들을 섬기지 않으면 농사를 지어도 수확을 거둘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연계에 계절마다 반복되는 고사(枯事)와 소생(蘇生)이라는 신비를 자연법칙에 의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남신과 여신의 성관계의 결과로 믿었으며 자신들의 생존이 걸려있는 땅의 풍성한 소출을 종교를 통해 지속시키고 강화시켜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신앙은 이들의 자연관과는 정 반대였으며, 마치 물과 기름처럼 공존이 불가능 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야웨의 창조 은총의 결과이지 경외해야할 신성한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야웨는 배우자를 필요로 하는 신도, 자연계의 변화에 따라 소진되고 소생하는 나약한 신도 아니었다. 야웨는 그들에게 어떠한 경쟁자도 용납치 않으시는 천상하지의 대 주재가 되시는 유일신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배타주의적 선택을 그들의 백성들에게 촉구하였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파를 세겜에 소집하여 일구지 않은 땅을 주시며 가꾸지 않은 포도와 무화과를 따먹게 해주신 야웨를 경외하며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그를 섬길 것을 명령한다.

"...다른 신들을 버리고 야훼를 섬기시오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택하시오... 나와 내집은 야훼를 섬기겠소" (여호수아 24:14-15 공동번역).바알 숭배가 횡행하던 아합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야웨가 참 하나님임을 밝히기 전에 백성을 향해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야훼가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열왕기상 18:21)라고 외치며 결단을 내리도록 종용하였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알을 따르는 것을 '영적인 간음행위'이며 신의 진노를 초래하는 치명적인 우상숭배행위라고 비판한다."나 야훼를 버리고 음란(淫亂)을 조장하는 것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아무리 음란을 피워도 자손이 불어나지 않으리라" (호세아 4:10-11). 호세아는 바알이 풍요를 가져다 줄것이라는 기대는 헛된 망상(妄想)에 불과하며 진정한 풍요를 줄 수 있는 실권자는 야훼임을 천명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섬기기를 그쳤기에 그들이 바라는 행복과 번영도 종쳤다는 것이다.

가나안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역사서나 예언서 외에도 인류의 기원과 성조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창세기에서 조차 묻어있는데 농경문화의 기우제를 위해 건축된 바벨론의 신전탑인 지구라트(ziggrat)를 바라보며 '혼돈'의 땅이라고 비판한 기록이라던지 (창세기 11:1-9), 유목민의 표상인 아벨이 짐승제사를 드리자 흠향하신 야훼께서는 농경민의 제물인 곡물제사는 거절하였다는 이야기(창세기 4:1-17), 당대의 의인이라 불리우던 노아가 가나안 농산물인 포도로 담근 술에취해 자식들 앞에 벌거벗고 드러누운 추태를 보였다는 이야기와 또 그가 함의 후손인 가나안인을 저주했다는 이야기(창세기 9:18-27)는 다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갈등과 반발을 투영하고 있는 이야기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 가치순위 1위-뭐니뭐니해도 건강이 제일이여!

하지만 실제 이스라엘 역사는 이러한 가나안 문화의 유혹앞에 끊임없이 걸려 넘어진 생생한 체험들로 점철되어 있다. 유랑민에서 정착민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인들도 이제는 가나안인들과 똑같이 어떻게하면 가축들로 하여금 더 많은 새끼들을 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더 많은 소출(所出)을 수확할 수 있을까하는 일들로 골몰하게된 것이다.

전쟁의 위기와 재난에 직면하여 승리를 주시는 야훼께 의지하였던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문제를 풀기위해 이 분야의 이름난 전문가인 바알을 향해 손짓하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이 양쪽으로 부터 동시에 보호를 받으려는 '꿩먹고 알먹고' 또는 '양다리 걸치기'식의 절충주의적 시도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고대 이스라엘을 분열시키고 파괴시키려던 가장 큰 위협이었던 찬란했던 가나안 농경문화의 바알숭배는 이제 먼 옛날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얼굴의 바알은 누구인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막강하고 거대한 21세기의 '바알'은 분명 노래방도 짜장면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술, 담배 인가? 물론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폐해와 손실은 개인과 가정을 파괴하여 불행의 구렁텅이로 얼마든지 빠지게 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하다. 과학적으로 담배가 얼마나 호흡기와 폐와 간에 직접, 간접으로 악영향을 주며 심한경우 폐암, 간암으로 발병되어 천하보다 귀한 목숨까지 우습게 앗아가버린다는 사실을 반복 하는 것은 시간 낭비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가도 되느냐', '먹어도 되느냐' 'Yes or No'의 답변을 너무 궁금하게 생각한다. Yes 하면 자유주의자 이며 No 하면 보수주의자 인가? 우리에겐 왜 Yes 인지 No 인지가 더 중요한게 아닌가 말이다. 성서에 어디 담배피우지 말라고 했느냐, 예수께서도 가나 혼인잔치때 물로 백포도주를 만드셨는데 뭘 그러느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잔'만 하면 될거 아니야, 나실인(Nazarite)은 독주를 분명히 마시지 말라고 했으니 나사렛 예수를 믿는 우리(Nazoreans)도 술을 입에 대지 말아야지, 그런데 머리에 삭도(削刀)를 대지 말라는 조항은 왜 지맘대로 안지키는 건가? 우리네 조상님들처럼 머리땋고 다니던지, 상투하던지 해야되는거 아니냐? 노래방가서 유행가 안부르고 복음송가나 찬송가 부르면 되지 않겠는가?


 

서로를 열받게 하고 섭섭하게 하는 이 모든 질문 너머있는 막강 배후조종 세력인 21세기의 바알이 여전히 버티고 있는데도 우리는 '몸통'은 가만히 놔두고 '깃털'만 가지고 남의 코끝앞에 디밀어 까불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사회나 이민사회의 가치순위 일위는 뭐니 뭐니해도 뭐니(money)가 최고가 아니라 만장일치로 건강을 채택했다.

여기에 누구하나 이의가 없다.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내 주먹교인이든, 남녀호랑나비 앗싸교인이든, 신나라 꿈나라 아기아기 잘도잔다 교인이든, 만성피로에는 구세주구연산이 최고라면 그거 사다먹고, 신경통엔 바이오 지남철 팔찌가 '왔다'라면 그거 사다 차고 다닌다. 산 강아지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데, 육척거구에 십육문 운동화 신고 다니면 뭘해, 아파서 골골하면 그것도 말짱 헛거 아니겠냐만 도대체 그 건강 ‘엇따’ 쓰고 있는건지 끝까지 살펴봐야 하는거 아니냐는 말이다. 건강한 손과 발로 남 등쳐먹고 도둑질 하지는 않더래도 그 건강 가지고 자기 일신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아득바득, 쫀쫀하게 쓴다면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선 명백히 건강의 오용(誤用)이다.

돈에 한맺혀, 공부에 한맺혀, 권력에 한맺혀 이민 왔다는 우리가 자기가 가진 재력과 학력과 권력을 예수처럼 모든 사람들을 부요케 하기위해 스스로 가난케 되시며 천국의 비밀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자들의 눈 열어보게 하시며 귀에 들려 주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시며, 십자가 상에서 조차 열두군단 (로마의 한 군단 6,000 x 12 = 72,000명) 더되는 천국 천사부대 부르지 않으시고 순순히 고난의 잔을 마신 것처럼 사용하진 못해도 제 몸하나 제 식구들만을 위해 남이 치이던, 밟히던 상관 않고 사용한다면 젯밥에 눈이 어두워 가나안 신전에서 성창들과 나 뒹구는 이스라엘 남정네들이나 사방천지 똥 싸질러 놓고도 밥그릇 아귀다툼하는 한국 정치 경제 졸부 나리님들과 다를바가 뭐 있겠는가 이말이다.

공중의 새들고 먹이시고 이름없는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인 이라면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지 남들은 사흘에 죽한그릇 구경하던말던 제 곡간 허물어 더 크게 지어놓고 곡식단을 하늘 똥꾸멍이라도 찌를듯 쌓아두는 자들이 어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구원받은 백성이라 말인가. 저들은 차라리 구억(九億)챙긴 의원님이던지 구조(九兆) 숨긴 회장님은 될 수 있을지언정 구원받은 백성은 절대로 못된다.

땅에서도 지 한몸 잘먹고 잘산 이자들과 함께 천국에서 사이좋게 살라고 한다면 나는 차라리 그딴 천국을 가출해버리고 말것 같다. 남들 다하는 공부해선 남들 다해먹는 자리한번 앉아보고, 남들 다 좋다는거 사고 먹고 살면서도 내 돈갖고 내 맘대로 하는데 니가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냐고 힐문하는 세상에, 더러워서라도 나도 한몫 챙겨보자는 막가는 세상에 우리시대의 예언자는 일용할 배고픔을 위해 기도하라고 외치고 있다. (참 이양반 웃기는 짜장이시네! 아, 노래방 가도 되냐구요~ 그것만 가르쳐 달라고요~)


정영민 목사 pastorymjung@gmail.com


김희범 2011-12-29 (목) 01:02:48
아주 흥미로운 칼럼입니다..근데 주일날 짜장면 먹는게 금기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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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민 2012-01-11 (수) 03:06:05
안녕하세요? 김희범님...제가 막 아이디를 만들었습니다. 답변이 늦어진 점 너그러히 용서하십시요.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단 중 일부는 주일 날, 어디가서 돈을 쓰고 물건을 사는 일 자체를 거룩하게 온전한 주일 성수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기에 주일학교 교사회가 단체로 중국집에가서 음식을 시켜서 먹는 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것이지요. 그러기에 장을 본 다는 지 하는 일은 주일이 오기전에 미리 다 준비해 두고 주일은 예배를 드리고 미리 준비된 음식을 나누며 안식하길 권장했지요. 교인들을 종교에 메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오늘 날 처럼 이른 아침 일찍 교회가서 눈도장 찍고 휙~하니 저 푸른 초원위에 나가 신나게 골프를 치는 젠틀멘(?)에게 예수님의 제자도가 있는지는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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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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