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맨해튼 12가 ‘빌리지이스트시네마’ 제6관. 두 명의 젊은 남녀가 수십 명의 조촐한 관객 앞에 섰습니다.
제7회 뉴욕한국영화제(KAFFNY)의 데이브 김 위원장과 수지 임 아트디렉터였습니다.
뉴욕한국영화제의 마지막 행사를 미주 한국영화의 개척자(開拓者)로 불리는 한동신 전 오픈워크 대표를 위한 헌정영화제로 연
것이었지요. 한동신 대표는 한국 영화의 존재감이 전혀 없던 1980년대 후반부터 뉴욕 등 미 동부에서 독보적인 한국 영화 큐레이터이자
평론가였습니다.
1994년 아시아소사이어티와 MoMA(뉴욕현대미술관)와 함께 미주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한국 영화 10년
1983∼1993’전은 기념비적인 기획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당시 한국 영화계는 영어 자막은 고사하고 스틸사진조차 구하기 힘들만큼 난맥상을
보이던 시절이었지요. 그런 어려움속에서도 한동신 대표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와 ‘칠수와 만수’ 등 당대 최고의 작품들을 선보임으로써
미국인들이 한국 영화를 처음으로 주목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1996년엔 MoMA에서 한국의 거장 3인을 한꺼번에 소개하는 ‘신상옥, 임권택, 유현목 회고전’을 개최했고 역시
MoMA에서 2002년 ‘신상옥 감독 회고전’, 2004년 ‘임권택 감독 회고전’, 2007년 ‘김기덕 감독 회고전’을 차례로
열었습니다.
최초의 아시안 할리우드 스타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작품 ‘애나 메이 웡’의 홍윤아 감독은 “1990년대 초만 해도
미국인들은 한국 영화에 대한 정보는 커녕, 한 번 봤다는 사람조차 없었다. 한동신 대표는 한국 영화의 모든 것을 개척한 입지전(立志傳) 적
인물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초 문화기획사 ‘오픈워크’를 설립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미 주류사회에 소개하고 ‘여성포럼’ 등을
정기적으로 개최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1999년 명창 안숙선씨를 초청, 뉴욕 맨해튼에서 최초의 판소리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것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인물인지 잘 말해줍니다.
이날 열린 ‘한동신 헌정영화제’는 지난 1월 불의의 열차사고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그이가 지난 20여년 간 한국 영화와
예술을 미국에 전파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여 뒤인 11월 7일 MoMA에서 ‘한국 영화의 밤’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달 창립 60주년을 맞은 CJ가
신진 영화감독들의 글로벌 진출을 지원한다는 취지(趣旨)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문병곤 감독의 단편 ‘세이프’와 조성희 감독의 ‘짐승의 끝’ 두 편의 시사회를 겸한 이날 행사엔 주최측인 CJ그룹의
이미경 부회장과 미국의 대형 미디어그룹 VIACOM의 더그 셀린 부사장 등 미국의 주요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 영화배우 이병헌, 하정우, 고수,
공효진과 ‘국제가수’ 싸이가 함께 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비록 CJ의 자축연이었지만 한국인 참석자들은 세계적 문화공간 MoMA에서 한국영화제가 열렸다는 사실에 뿌듯해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행사를 바라보는 뉴욕의 한인 영화인들과 한인사회의 눈은 곱지 않습니다.
신진 감독의 글로벌 진출을 위한 한국영화제라면 취지에 맞게 재능있는 감독의 작품들을 더욱 다양하게 구성하고 주류사회에
충분한 홍보를 해야 할텐데 단발 행사를 위해 많은 돈을 들인 ‘그들만의 이벤트’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밝혔다시피 MoMA와 한국 영화의 인연은 미주 한국영화의 선구자(先驅者) 한동신 대표가 이미 20여년 전에 구축한
것입니다. 그것도 형식적인 파트너가 아닌 공동주최자로 미주순회영화제를 열고 한국의 대표 감독들 회고전까지 줄줄이 개최한 것입니다.
사실 MoMA에선 지난 8월에 ‘진짜배기’ 한국영화제가 있었습니다. 코리아소사이어티와 MoMA가 공동주최한 한국영화시리즈
‘포커스 온 코리아(Focus on Korea)’에서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1985(2012)’ 등 5개 작품이 일주일 간 상영된
것입니다.
한국 영화계에서 초월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 CJ가 MoMA에서 자축 성격의 행사를 열면서 ‘한국영화제’라는 타이틀을 내건
것은 낯간지럽습니다. 기왕이면 ‘포커스 온 코리아’같은 영화제나 ‘한동신 헌정영화제’와 같은 행사를 후원하는 것으로 60주년을 축하했다면
한인사회의 소외감(疎外感)이 덜했을 것입니다.
한동신 헌정영화제는 뉴욕의 유학파 영화인들과 2세 한인 영화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연 것입니다. 2007년
뉴욕한국영화제를 창설한 데이브 김 위원장은 “뉴욕의 영화인들이 100% 자원봉사와 주머니 돈을 보태고 있지만 스폰서가 부족해 너무 어려움이
많다”면서도 “미주 한국영화의 선구자인 한동신 대표를 추모(追慕)하고 그분의 공적이 그냥 묻혀지지 않도록 이번 행사를 열게 됐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최근 한국에선 CJ CGV와 롯데시네마, 쇼박스미디어플렉스 등 극장과 배급망을 장악하고 있는 대기업의 횡포에 반발해
새로운 형태의 공동투자배급사 ‘리틀빅픽쳐스’가 설립됐습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CJ CGV 등 3대 배급사가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의 독과점
지위를 이용해 스크린 독과점, 극장 설비 비용 전가 등 횡포를 부리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반면 미국은 어떠할까요. 영화 ‘아바타’ 광풍이 엄청났던 지난 2009년 성탄절 무렵 미국의 멀티플렉스에서는 한국에선 볼
수 없는 특이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극장 당 2∼4개 상영관만이 아바타에 배정됐을뿐 나머지 10~15개 정도의 상영관에서는 다른 작품들이
상영됐기 때문입니다.
아바타를 보려는 관객들이 자리가 없어 그냥 돌아가는 사태가 잇따랐지만 다른 영화들은 원래의 스케줄대로 상영이 됐습니다.
심지어 당시 한인 영화배급사가 들여온 한국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도 뉴욕과 뉴저지, 댈라스, 애틀랜타, 시카고의 중심 지역 대형 극장에
당당하게 개봉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초저예산 영화가 아바타와 함께 걸린 것은 물론 한인 배급사의 눈물겨운 노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회의 균등’이라는 원칙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할리우드 영화가 가진 힘의 원천(源泉)입니다.
한 영화 관계자는 “미국의 대형 극장 체인들은 아무리 특정 영화가 월등한 관객을 동원하고 있어도 한국과 같은 스크린
독과점 현상을 보이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당장은 이익을 보겠지만 그것이 영화의 다양성을 해치고 중소 영화와 배급사들을 죽게 만드는 일이며,
이들이 죽으면 결국 극장도 설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전 세계 영화를 쥐락펴락하는 헐리우드의 큰손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CJ가 창립 60주년을 맞아 해야 할 일은
외화내빈의 이벤트가 아니라 한국영화 산업의 발전과 세계화를 위한 진지한 고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