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퀸’ 김연아의 경기가 열린 시간은 뉴욕에선 점심이었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한인타운의 식당가에서, 사무실에서 김연아의 경기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물흐르듯 유연한 몸놀림으로 흠잡을데 없이 경기를 마치고도 러시아의 소트니코바에 5점이상 뒤진 결과가 발표되자 거친 욕설(辱說)이 터져나왔다. “이게 뭐야? 심판들 미친거아냐?” NBC-TV 중계팀의 김연아 찬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눈달린 사람이라면 김연아가 소트니코바에 뒤져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하 사진 뉴시스 김인철기자>
아무런 실수없이 수행과제를 완벽하게 소화한 선수는 144점이고, 점프에서 한번 휘청하고 비틀대기까지 한 선수가 149점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4년전 세계최고점을 내며 금메달리스트의 완숙한 예술 연기와 솔직히 1년전만해도 ‘듣보잡’이었던 17세 신예의 예술점수가 대등한 것을 어떻게 납득해야 하는가. 제아무리 심판들이 전문성을 강조해도 상식선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결과가 지구상 최대의 스포츠제전이라는 올림픽에서 벌어졌다.
홈링크의 이점을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낯두껍게 점수가 매겨질줄은 상상을 하지 못했다. 우리 한국인들만이 아니라 이날 경기를 지켜본 많은 미국인들, 세계 각국의 언론사, 전문가들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반응이다. 김연아가 소트니코바보다 5점이상 뒤져야 하는 이유가 도무지 요령부득인 것이다.
98나가노에서 세계최연소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낸 타라 리핀스키 등 NBC-TV 해설진은 주최국 선수들이 아주 관대한 점수들을 받고 있다며 연 이틀 꼬집었다. 한시즌만에 자신의 점수를 50점이상 올려놓는 기적은 관대함을 넘어 뻔뻔함이다. 과연 러시아는 피겨 금메달이 자랑스러울까. 소치 올림픽이 아니라 ‘수치 올림픽’이라는 조소를 무시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런 나라가 쇼트트랙의 영웅 안현수의 새로운 조국이라는게 화가 난다.
결과론이지만 이번 대회는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등 아시아선수들이 철저한 타겟이었다. 4년전 올림픽 금은메달을 나눠 가진 아시아의 두 선수를 철저하게 견제했다는 분석이 심판진의 점수를 보면 가능하다.
아사다가 쇼트프로그램에서 부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16위로 떨어질만큼 최악은 아니라고 NBC 해설진은 지적했다. 이번 대회에서 선수들의 연기를 잘 분석하고 점수를 정확하게 예측한 리핀스키는 “아사다의 쇼트점수는 너무 충격적”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했다. 그녀가 부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55점대는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선수들에 대한 차별적인 점수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초 러시아가 금메달후보로 작정한 리프니츠카야는 쇼트프로그램에서 큰 실수를 하고도 6위의 고득점을 했다. 더욱 가관은 프리스케이팅이다. 전날과 비슷한 실수를 했는데도 무려 135.4점을 보태 한때 ‘넘사벽’으로 불린 200점대(200.57)를 돌파했다.
밴쿠버에서 16위에 그친 이탈리아의 캐롤라인 코스트너가 물론 무난한 연기를 했지만 그녀역시 과도한 점수를 받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유럽선수라는 점에서, 또한 러시아만 마구 퍼줄 수 없는 난처함도 있었을 것이다. 주최국 러시아와 메달후보가 될만한 유럽선수 한두명은 관대한 점수를 받았고 김연아와 아사다는 현미경 잣대를 넘어 노골적인 횡포(橫暴)의 희생양이 되었다. 소트니코바가 한차례 점프를 더한 것은 보이고 두 번의 실수는 보이지 않았던 걸까.
아마도 그들은 김연아가 아주 미세한 실수라도 저지르길 바랬을 것 같다. 그래야 개최국 선수에 금메달을 주어도 덜 논란이 될테니까. 하지만 김연아는 전혀 실수를 하지 않았다. 못해도 본전인 신예들에 비해 챔피언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그녀가 정신적 부담이 컸을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일반의 예상을 깨고 너무나 편안하고 완벽하게 경기를 했다.
부상후유증과 챔피언의 명성이라는 엄청난 스트레스에도 올림픽의 마지막 무대를 멋지게 장식한 김연아에 비견(比肩)할 선수는 없었다. 역대 최고점을 주어 피겨퀸에게 경배(敬拜)를 표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던 무대였다.
김연아의 경기가 끝나는 순간 눈물이 핑도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지난 8넌간의 세월, 세계가 그녀를 주시하고 엄청난 중압감에서 어떻게 이토록 완벽한 경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김연아는 피겨불모의 땅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으로 세계 챔피언이 되었고 더 어려운 조건에서 두 번째 올림픽에 도전했는데 우리는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때문이다.
소치올림픽이 정말 어려운 대회가 될거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했다. 2010밴쿠버는 다행히 한일간의 싸움이었지만 사상 첫 여자피겨 금을 노리는 주최국의 노골적인 텃세는 상식에 속했다. 러시아 심판이 판정의 가장 중요한 ‘콘트럴러’였다면 더욱 대비를 해야 했다.
김연아가 챔피언으로서 이득을 보는게 아니라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도록 빙상연맹이, 한국의 IOC위원들이, 차기 개최국의 장점을 활용한 바람막이가 되줘야 했다. 따지고보면 평창이 2014년 개최권을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2010올림픽을 밴쿠버에게 아깝게 내주었으니 절치부심, 면밀한 전략으로 재도전 했어야 했다. 동계올림픽을 개최하기엔 너무 따뜻한 휴양도시에 밀린 결과가 김연아의 눈물로 나온게 아닌가.
오늘 우리는 세계최고의 선수가 최고의 경기를 하고도 어이없게 2위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것이 승부의 세계라고? 억울해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이라고? 그러나 부당함을 당하고도 가만있는 것은 스포츠정신이 아니다. 심판진의 점수를 조목조목 분석해 편파성(偏頗性)을 입증하고 잘못된 판정이라는 여론을 확산시켜야 한다. 혹여 부당한 뒷거래는 없었는지도 파악해야 한다.
비록 메달의 색을 뒤바꾸지 못한다해도 그런 노력만으로도 지금까지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준 김연아에게 덜 미안한 일이 될 것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요. 김연아선수 하지만 그대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피겨퀸’입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10:09:22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